1월의 과학사: 우주를 향한 카운트 다운

 2013년 1월 30일. 30m가 넘는 거대한 기둥이 고흥우주센터 발사대에 설치되었다. 연이은 실패에 이어 4개월이나 걸린 발사 지연까지 악재가 계속되었다. 많은 사람의 걱정 뿐 아니라 마지막 기대까지 안고 들어간 카운트 다운. 오후 4시에 불을 뿜은 엔진은 창공을 뚫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성공이 판가름 나는 시간은 단 9분. 위성의 위치는 정상궤도였다. 세 번째 도전 만에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발사체 로켓, 나로호가 성공하였다.

나로호 3차 발사 모습


 우리나라의 로켓 개발 역사는 가시밭길 투성이였다. 기본적으로 거대한 자본과 기술이 필요한 사업인데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는 찾기 힘들다 보니 우선순위가 낮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1989년 항공우주연구원이 설립되었지만 이때까지도 우리나라에서 로켓은 ‘우주’를 가기 위한 용도라기보다 공격용 미사일 쪽에 더 무게가 실려 있었다. 문제는 이 같은 내부에만 있지 않았다. 당시 세계 로켓 기술을 선도하던 미국은 1987년, 미사일 기술 통제 체제(MTCR)를 만들어 해당 기술이 다른 나라에 유출되는 것 자체를 경계하였다. 일본이 미국에게서, 인도가 러시아에게서 기술을 전달받은 것은 이 통제 협정 이전에 이뤄진 일이었기에 가능했다. 후발주자였던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현재 MTCR 가입국. 우리나라는 2001년에 가입하였다.


 이런 황무지에서 처음 시작된 미션은 KSR(Korea Sounding Rocket)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1단짜리 고체연료 로켓이었던 KSR-1은 6.7m 크기에 1.25t의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1993년 발사된 로켓은 성공적으로 비행했다. 발사대 연습장이 없어 연구원 주차장에 간이 발사대로 연습해야 할 정도로 열악했던 환경에서 거둔 최초의 성과였다. 이 성공에 힘입어 KSR-2는 분리형 로켓으로 설계되었다. 1차 시도에서는 실패했던 발사는 1998년 2차 발사에서는 성공하여 드디어 100km 상공을 돌파했다.

KSR-1의 발사 모습

 이처럼 천천히 경험을 쌓고 있던 우리나라 로켓 개발 사이클에 기름을 부어버린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이었다. 우리나라가 KSR-2의 발사와 KSR-3의 개발을 진행하던 1998년. 북한이 대포동 1호를 발사한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일본, 미국 등 여러 나라에 충격을 줬다. 러시아의 스푸트니크 1호를 눈뜨고 지켜봐야 했던 미국처럼 우리나라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2002년 KSR-3 발사에 성공하면서 빠르게 다음 스텝을 밟아야 했다. 2005년으로 당겨진 KSLV(Korea Space Launch Vehicle), 한국형 발사체 계획은 변경이 불가피했다.

 KSLV의 개발을 혼자 진행하기보다 국제 협력을 통해 개발하는 방향으로 결정이 되었다. 이제 그 파트너를 찾아야 하는데 선택지는 사실상 하나였다. 로켓 기술의 외부 유출을 꺼리는 미국이나 일본 등을 제외하면 로켓 기술의 상업화에 큰 관심을 보이던 러시아가 거의 유일한 도우미였다. 그 결과 1단 로켓은 러시아가 개발하고 2단 로켓 부분은 우리나라가 전담하는 형태의 로켓이 계획된다. 마침 지어지고 있던 나로 우주센터의 이름을 딴 ‘나로호’의 시작이었다.

나로우주센터 발사대의 모습. 기존 우주센터 건립 적합지 심사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은 것은 제주도였으나 지역 주민의 반대로 전남 고흥에 우주센터가 만들어졌다.


 러시아로부터 고흥 우주센터의 설계 부분부터 개발 시 어떤 부분을 테스트해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개발이 진행되는지 등 여러 방면에서 경험치를 받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2단 로켓 자체 개발에 성공하였고 자체 테스트까지 끝마칠 수 있었다. 이제 러시아에서 날아온 1단 로켓과 조립하여 발사하는 것만 남았다. 협력 와중 여러 이유로 미뤄진 발사는 초기 계획이었던 2005년을 넘어 2009년 8월로 예정되었다. 8월 19일. 발사 8분 전 고압 탱크 압력 센서 오류로 발사가 취소되고 약 1주일이 지난 25일. 드디어 1차 발사가 시작되었다.

페어링이 분리되는 모습. 1차 발사에서는 이 페어링 중 한쪽이 떨어져 나가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던 나로호의 첫 비행은 9분 만에 실패로 판명되었다. 위성을 감싸고 있는 페어링 2개 중 한쪽이 분리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분리되지 않은 페어링 무게 때문에 인공위성이 목표 속도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안타까운 실패였지만 1단과 2단 로켓 분리 성공, 점화 성공, 위성체 분리 성공 등 얻은 수확도 분명히 있었다. 해당 부분을 손 본 연구진은 약 10개월이 지난 2010년 6월. 두 번째 발사를 시도한다. 그런데 날아간 두 번째 나로호는 137초 만에 폭발하고 만다. 1차 실패 때처럼 확실한 실패 요인이 보이지 않는 ‘사고’ 그 자체였다.

나로호 2차 발사 장면. 폭발한 나로호는 제주도 남단 바다에 추락했다.


 137초는 아직 1단 로켓이 발사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러시아가 만든 1단 로켓을 의심했다. 반면 러시아에서는 2단 로켓에 있는 비행종단시스템(발사체에 긴급한 상황 발생 시 비행을 중단시켜버리는 장치)에 문제가 생긴 것 아니냐는 주장을 했다. 양측 주장은 평행선을 달렸고 결국 확실한 원인을 밝히지 못한 채 3차 발사 준비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에게 1단 로켓 기술도 못 받으면서 하는 발사가 의미있냐는 주장부터(애초에 국제 협약 상 1단 로켓 기술을 받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로켓 개발 자체가 낭비라는 말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악재 속에 시간은 흘러 2012년. 3차 발사 예정일이 다가왔다.

2012년 11월. 발사 취소 당시 방송 화면


 2012년은 나로호에게 시련의 한 해였다. 먼저 첫 발사가 예정되었던 10월 26일. 연료 공급 연결부에서 파손이 발견되어 발사가 연기된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 11월 29일. 발사 22분 전에 부품 고장이 발견되어 또 발사가 연기된다. 그 와중에 북한이 은하 3호 2차 발사에서 위성을 궤도에 올리는 것에 성공하면서(위성이 정상 작동되었는지는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다.) 나로호의 부담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그렇게 나로호는 해를 넘겨 2013년 1월. 다시 발사대에 올랐다.

발사대에 올라선 나로호의 모습


 오랜 기다림 끝에 발사한 세 번째 나로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예상 범위 안에서 작동하였다. 다단 로켓 분리, 2단 로켓 점화, 인공위성 분리 등 모든 상황이 정상적이었고 위성 통신 또한 성공적이었다. 그동안 받았던 의심의 무게를 던진 나로호는 그렇게 우주를 향해 날았다. 나로호가 올린 것은 단순히 과학 위성이 아니라 대한민국 우주개발의 엔진 그 자체였다.

2022년 6월 21일. 누리호 발사 장면


 2013년의 성공 이후 시간이 흘러 2022년 6월. 1단 로켓까지 전부 우리 기술로 개발한 누리호가 2차 도전 만에 성공을 거뒀다. 로켓의 크기, 무게, 엔진의 힘까지 나로호를 훨씬 뛰어넘은 누리호의 성공은 당시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던 많은 국민의 마음에 자부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6.7m짜리 KSR에서 시작하여 40m가 넘는 누리호 로켓을 세우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3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발사체 역사. KSR부터 누리호까지 비교할 수 있다.


 우주 로켓 개발은 실패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실제로 나로호의 두 차례 실패로 우리 연구진은 러시아 연구진으로부터 더 많은 기술을 배울 기회를 얻었다.(실패 과정 연구와 테스트 방법 등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지금의 성과까지 올라오는 데 수많은 연구진의 노력이 서려 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단순히 연구진의 노력만으로 다음 스텝을 밟기는 어렵다. 더 심화된 우주 경쟁 속에 살아남으려면 더 많은 관심과 지지가 있어야만 새로운 도전에 들어갈 수 있다. 나로호가 두 차례 그랬던 것처럼, 누리호가 한 차례 그랬던 것처럼 또 다른 실패가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가 진정 무서워해야 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포기하여 사라질 ‘미래’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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