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과학사: 전쟁을 넘어선 과학

 우리는 ‘일반상대성이론’이라 하면 굉장히 어렵고 난해한 이론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것이 잘못되거나 틀린 이론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반대로 거의 없다. 수많은 과학적 관측을 통해 이미 ‘증명’된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 많은 증명 중 가장 첫 번째이자 가장 과학 역사에 큰 영향을 준 사건은 지금부터 약 100여 년 전인 1919년 5월 29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직 1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남긴 소리가 이명처럼 남아 떠돌던 그 1919년의 봄날. 영국의 천문학자 아서 스탠리 에딩턴은 아프리카의 서쪽에 위치한 작은 섬 ‘프린시페’에 도착했다. 그의 목적은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일반상대성이론’의 증명이었다.

아서 스탠리 에딩턴의 모습


 스위스의 무명인이자 특허국 직원이었던 아인슈타인은 기적의 해라 불리는 1905년(광전효과, 특수상대성이론 발표) 이후에도 그다지 큰 유명세를 얻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암암리에 그의 이론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많이 등장했다. 독일 과학계의 거목인 ‘막스 플랑크’, 네덜란드의 유명한 물리학자 ‘헨드릭 로렌츠’, 아인슈타인의 대학 시절 교수였던 ‘헤르만 민코프스키’ 등이 그 중 중요한 인물이었다. 조금씩 이름을 알리던 아인슈타인은 1909년이 되어서야 베른의 특허국을 떠나 취리히 대학교수 자리를 얻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물리학계에 뛰어들게 된다.

아인슈타인이 잠시 머물렀던 프라하의 카를 대학교. 이곳에서 발표했던 논문에서 예측한 빛의 휘어짐은 이론이 완성되지 않아 부정확했다. 만약 이른 일식 관측에 성공했다면 그의 이론의 신빙성이 떨어졌을 수도 있다.


 이미 이 시기 이전부터 그는 상대성이론을 좀 더 확장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대성이론으로 중력이라는 힘을 설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뉴턴이 만든 고전물리학에 정면 대결을 신청한 것과 같았다. 1911년 프라하로 잠시 자리를 옮겨 연구를 하던 사이 ‘빛의 진행에 중력이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다. 이는 일반상대성이론의 초석에 가까운 내용으로 태양의 중력에 의해 별빛이 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계산하여 담고 있었다. 이 이론에 대한 증명은 어찌보면 간단했다. 실제로 태양에 의해 별이 보이는 위치가 평소와 달라지는지 확인하면 되는 것이었다. 다만 이런 상황은 일식이 있을 때에만 측정이 가능했다. 당시에 찍어놨던 일식 사진들은 태양의 대기인 코로나 또는 홍염을 찍기 위함이었지 주변 별을 찍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일식이 있어야 그의 이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을 위한 일식 관측 시도는 그가 1914년 3월, 막스 플랑크의 제안으로 베를린 대학으로 적을 옮기면서 시작되었다. 그해 7월 19일, 플랑크의 도움으로 얻은 자금과 독일 군수업체인 크루프사의 자금으로 일식 원정대가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 날로부터 9일이 지난 7월 28일. 오스트리아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1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당겨진 것이었다.

1914년 출발한 일식 원정대의 책임자였던 천문학자 에르빈 프로인틀리히의 모습. 그는 러시아의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포로 교환으로 풀려났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증명하려 출발한 일식 원정대의 목적지는 하필 크림 반도였다. 오스트리아가 터트린 전쟁의 불길은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으며 그 중 러시아와 독일은 적국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고성능 광학 장비를 가진 적국의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땅에서 움직인다는 것이 정상적인 상황이라 보긴 힘들었다. 결국 원정대는 체포되었고 일식은 지나가 버렸다. 전쟁이 과학의 전진을 막아버리고 말았다. 이제 학자들 역시 조금씩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들 일만 남은 상태였다. 이처럼 비이성적인 전쟁은 극도로 이성적인 일을 하는 학자들에게 이상한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전쟁 초기 독일군의 벨기에 루뱅대학 파괴 및 학살 사건이 알려지자 전 세계에서 독일에 대한 비난이 이어졌다. 이 상황에서 오히려 독일의 지식인층과 문화계 인사들이 독일군의 행위를 옹호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었다. 무려 93명이 서명한 이 성명서에는 아인슈타인을 독일로 끌어들인 막스 플랑크, 1회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빌헬름 뢴트겐 등의 과학자 뿐 아니라 극작가, 건축가, 철학자, 화가, 연출가 등 독일을 대표하는 각계 각층의 인사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문서의 파급력은 생각보다 컸다. 당장 영국에서 이 성명서를 비판하는 답신을 보냈으며 양국의 과학자들은 서로 교류를 끊었고 서로의 연구를 논문에서 인용하지도 않고 심지어 유학생들이 체포 또는 추방되는 일이 벌어졌다.

독일 과학계의 대부인 막스 플랑크의 모습과 파괴된 루뱅 대학교의 모습. 이후 플랑크는 자신이 어떤 것에 서명했는지 잘 확인하지도 않았으며 그 행동을 후회한다는 이야기를 수차례 하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과학계에서 일어난 일은 영국의 30대의 젊은 천문학자였던 아서 에딩턴에게도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당장 영국 과학자 중 차기 노벨상 수상자로 유력했던 헨리 모즐리가 전사했으며(그가 전사한 전투는 1차 대전 중 처칠이 저지른 최악의 실패로 손꼽히는 갈리폴리 전투였다.) 에딩턴이 있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도 전사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그의 조수로 활동하던 2명도 전쟁터로 떠난 이후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상황이 점차 나빠지면서 모병제였던 영국의 제도가 징병으로 변화되자, 퀘이커 교도로서 본인의 종교적 신념에 의해 전쟁에 나갈 생각이 없던 에딩턴에게도 전쟁의 올가미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갈리폴리 전투의 모습. 이 전투에서 양측 도합 50만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1916년, 에딩턴에게 편지가 한 통 배달된다. 중립국이었던 네덜란드의 천문학자였던 빌렘 드 시터가 1915년 아인슈타인이 완성한 일반상대성이론에 관한 내용을 요약하여 보낸 것이다. 영국과 독일 양국의 과학 교류가 완전히 단절된 상황에서 에딩턴이 받은 편지는 매우 운이 좋았다. 당시 강경하게 독일 과학계를 비판하던 학계의 다른 인사들과 달리 에딩턴은 평화주의자였으며 과학계의 국제화를 다시 이뤄내려 노력하는 인물이었다. 마침 아인슈타인이 93인의 학자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반전 관련 성명서를 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에딩턴의 관심을 더욱 끌어들일 수 있었다. 에딩턴에게 일반상대성이론은 옳은 이론을 넘어 단절된 과학계를 연결해 줄 희망이 되었다.

 상대성이론이 영국에 조금씩 조금씩 알려지던 그때, 전쟁 상황은 악화되기만 했다. 사람을 갈아버리는 듯한 참호전은 더 많은 생명을 원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영국의 징병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케임브리지 측의 노력으로 천문대 내 유일한 남자 직원으로 남아있던 에딩턴의 코앞까지 징병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사실 선택은 한가지였다. 종교적 이유를 이용한 양심적 병역 기피는 이제 영국 병무청에게 그다지 큰 무기가 되지 못했다. 먼저 떠난 과학자들의 죽음으로 인해 학문적 이유로 인한 면제를 받는 방법이 남아있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는 계속 에딩턴을 이 이유를 들어 붙잡을 수 있었다. (이 기간 케임브리지는 에딩턴보다 더 격렬한 평화주의 활동을 하던 한 명의 학자를 해고해야 했다. 훗날 전 세계적 대학자가 되는 버트런드 러셀이었다.) 몇 개월 단위로 연장되는 상황은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학계 역시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가 개발한 독가스가 전선에 투입되었고 독일 과학계에 대한 증오가 더욱 두터워졌다. 이 상황에서 ‘적국 독일’의 학자였던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의 증명을 위해 에딩턴이 1919년의 일식 탐험을 계획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19년 5월 29일 개기일식 경로.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관통하는 모습이다.


 에딩턴은 상대성이론에 대한 해설서를 본인이 직접 작성하고 영국 이곳저곳을 돌며 강연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아인슈타인과 직접적인 연락을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에딩턴 버전의 상대성이론이라 할 수 있었다. 그의 노력으로 뉴턴의 고전 물리학을 변형하여 빛의 휘어짐을 설명하려는 사람도 등장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상대성이론이 관심사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19년 일식을 촬영하기 위한 보조금을 얻어내는 것에 성공하였다. 심지어 이 원정을 위해 면제 역시 연장되었으니 그에겐 최상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이렇게 영국 과학계 안에서 에딩턴이 온갖 노력을 하고 있던 1918년 말, 세상에 평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동맹국 중 마지막까지 버티던 독일이 드디어 휴전 협정에 들어간 것이었다. 긴 터널의 끝이 보였다. 이제 에딩턴에게 남은 것은 일식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관측하느냐 뿐이었다.

프린시페 섬에 있는 바나나 해변의 모습. 에딩턴이 방문했을 당시에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으나 1975년 상투메 프린시페 민주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개기일식이 지나갈 것으로 예상되는 경로는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지역이었다. 약 1000파운드에 달하는 지원금으로 에딩턴은 원정대를 두 군데로 나누기로 결정했다. 혹시나 한 곳의 날씨가 좋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야했기 때문이었다. 에딩턴이 이끄는 팀은 아프리카의 프린시페 섬으로 목적지를 정했고 나머지 한 팀은 브라질로 이동하기로 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부합하는 결과를 가져올 장비 선정부터 촬영 방법까지 하나하나 다 체크한 탐험대는 이제 날씨의 가호만 받을 수 있기를 기다려야 했다.

태양에 의해 휘어지는 빛의 이미지. 저 휘어짐 때문에 실제 별의 위치와 우리가 관측한 위치가 달라지게 된다.


 5월 29일 아침, 두 군데의 하늘은 모두 잔뜩 흐렸다. 심지어 프린시페 섬은 폭풍우까지 몰아치고 있었다. 일식이 시작되는 순간, 브라질 소브라우의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늘 상태가 이대로 계속되면 원정은 대실패로 끝나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구름이 빠른 속도로 흩어졌고 개기일식이 시작된 순간에는 완전히 맑은 하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프린시페의 하늘은 폭풍우에서는 벗어났다. 그러나 브라질처럼 구름이 완전히 흩어지지는 않았다. 하늘 상태와 관계없이 원정팀은 망원경을 작동시켰다. 사진 건판 속에 구름 틈 사이로 드러난 천체의 흔적이 드러나길 바랄 뿐이었다.

사진 앞 부분에 있는 동그란 부품이 슬로스탯이다. 망원경을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이동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에 거울에 반사시켜 태양을 촬영했다. 거울을 움직이는 것이 망원경을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쉬웠기 때문이다.


 일식은 끝났지만 에딩턴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사진 속에서 아인슈타인이 예측한 빛의 휘어짐이 나타났는지 확인해야 했다. 이번 일식은 그 이전의 일식과 달리 황소자리에 위치한 히아데스 성단 주변에서 벌어져 비교할 별이 많은 상태였다. 그런데 사진을 확인하자 문제가 곳곳에서 발생했다. 브라질에서 찍힌 사진 중 주망원경이 찍은 사진에서 초점이 심각하게 망가진 것을 확인했다. 장비 중 하나였던 실로스탯 거울이 열팽창 때문에 뒤틀린 것이 원인으로 보였다. (그나마 다행히 4인치 보조 망원경으로 촬영한 사진은 정상적이었다.) 프린시페의 사진은 구름 때문에 대부분이 사용 불가였다. 비교할 대상인 별까지 촬영된 사진은 딱 두 장이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간신히 계산해 낸 빛의 휘어짐은 약 1.61초였다. 아인슈타인이 예측한 1.75와 근사한 값이라 봐도 무방했다. 이 결과를 두 탐사팀이 서로 공유한 것은 일식이 있었던 5월에서 무려 5개월이 지나간 10월 즈음이었다.

현대 기술로 화질이 복원된 1919년 일식 사진


 에딩턴은 이 관측 결과가 단순히 상대성이론을 증명하는 것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는 학회 뿐 아니라 대중의 관심까지 끌어들였다. 런던 타임즈와 탐사 전부터 인터뷰를 이어나갔고 이는 11월 6일 에딩턴이 관측 결과를 최종 발표하면서 전세계로 이야기가 퍼져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무려 ‘과학의 혁명(Revolution in Science)’이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헤드라인을 장식한 런던 타임즈부터 대서양을 건너 미국 뉴욕타임즈에도 아인슈타인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전후 고립되어 있던 독일 과학계에 속한 아인슈타인이 에딩턴에 의해 세계적 스타로 재탄생한 순간이었다. 과학이 끊어진 사람들 사이의 다리를 다시 연결한 것이기도 했다.

런던타임즈에 실린 기사. 과학의 혁명이라는 헤드라인이 잘 보인다.


 에딩턴의 관측 이후에도 상대성이론에 대한 증명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후 일어난 일식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빛의 휘어짐을 측정했으며 시간이 흘러 2015년에 중력파까지 발견하여 상대성이론이라는 성벽을 더욱 튼튼하게 다졌다. 하지만 1919년 5월에 있었던 이 관측만큼 과학계에 큰 영향을 준 증명은 없었다. 전쟁 속에 독일에서 일하는 유대인 과학자와 징집을 거부하던 퀘이커 교도 영국인 천문학자가 서로 직접적인 교류 한번 없이(에딩턴과 아인슈타인은 발표가 다 끝난 1919년 12월이 되어서야 서로 직접 편지를 썼다.) 위대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수백 년을 지속한 뉴턴의 성을 파괴하고 그 위에 국제적인 노력을 더해 과학의 새로운 성을 쌓았다. 인류의 역사 속에 수많은 전쟁이 있어왔다. 그럼에도 문명은 유지되었고 심지어 더 발전하기까지 했다. 그러한 모든 원동력은 ‘서로’, ‘함께’, ‘힘을 합쳐’ 이어져 온 사람들의 노력에 있지 않았을까. 에딩턴의 관측은 그만큼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1923년에 찍힌 사진. 뒷줄 왼쪽부터 알버트 아인슈타인, 파울 에렌페스트, 빌렘 드 시터. 아래줄 왼쪽부터 아서 에딩턴, 헨드릭 로렌츠. 모두 시대를 풍미한 학자들이며 아인슈타인의 든든한 협력자들이었다.

참고자료

  1. 매튜 스탠리(김영서 역). 2020. 아인슈타인의 전쟁. 브론스테인
  2. 윤신영. 2019. 일반상대성이론 검증 100년…개기일식, 우주에 대한 이해를 바꾸다. 동아사이언스
  3. 조일준. 2019. [유레카] 아인슈타인을 증명한 에딩턴. 한겨레
  4. 이종필. 2021. [사이언스N사피엔스] 일반상대성이론의 성립. 동아사이언스
  5. 가두연. 2019. [에딩턴의 일식 100주년 특별기획] 1919년의 일식, 세상을 바꾸다. SPACE TIMES
  6. Ron Cowen. 2019. The 1919 Solar Eclipse and General Relativity’s First Major Triumph. Scientific American

Copyright 2021. 의왕천문소식 김용환 연구원 All right reserved.
dydgks0148@astrocamp.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