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10월 5일. 캘리포니아에 있는 윌슨산의 정상. 거대한 망원경이 추운 밤공기를 뚫고 그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한밤중에 찍힌 천체 사진에는 무수히 많은 별이 검은빛을 내고 있었다. 그 검은빛 사이. 천문학 역사의 흐름을 바꾼 단 한 개의 점이 숨어있었다. 인류의 우주관을 압도적으로 확장시킨 작은 점 같은 별. 그리고 이 별을 찍은 사람은 20세기 최고의 천문학자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에드윈 허블. 젊고 자신감 넘치는 이 천문학자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는 첫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에드윈 허블은 사실 천문학과 거리가 먼 삶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미국 중서부 일리노이주 출신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 공부도 운동도 다 잘하는 만능형 청년이었다. 시카고대학교에 진학한 그의 전공은 천문학이 아니라 법학이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전공을 정한 그였으나 마침 당시 시카고대학교의 상황이 조금 특별해졌다. 미국인 최초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알버트 마이켈슨을 배출하면서 미국 과학의 자존심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허블 역시 과학. 그중에서 천문학에 관심을 보였다. 다만 아버지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법학도 허블은 장학생이 되어 영국 옥스퍼드대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옥스퍼드에서도 법학전공으로 공부를 시작한 허블은 영국 생활에 완전히 적응하였다. 단순히 생활습관뿐 아니라 말투까지 몇 년 간의 유학 생활 동안 바꿔버렸다. 약 2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법학과 부전공 스페인어를 배운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후 미국으로 돌아왔다. 고등학교에서 스페인어 교사로 재직하던 허블은 학생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던 스타였다. 1년 좀 넘는 시간 동안 교사로 지낸 허블은 이제야 천문학으로 고개를 돌렸다. 20대 중반을 넘어가던 허블은 1914년, 모교인 시카고대학의 여키스 천문대로 자리를 옮겼다. 드디어 허블이 자신이 원하던 길을 찾게 된 순간이었다.

허블이 한참 자라나고 있던 시절. 미국 천문학계에서는 더 좋은 관측 환경, 더 큰 망원경을 만들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사실 천문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유럽에서도 귀족적인 학문이었으며 그야말로 돈 먹는 하마와 다르지 않았다. 특히 성능 좋은 망원경을 제작하기 위한 자금이 필요했다. 더 큰 망원경일수록 더 많은 빛을 받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더 어두운 천체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시카고대학의 교수였던 조지 엘러리 헤일은 바로 이 거대한 망원경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 중 대표격이었다. 그는 시카고 지역의 철도왕이었던 여키스의 후원을 받아 세계 최대의 굴절망원경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여키스 천문대가 바로 이 사업가의 후원을 받아 만든 곳이었다.) 렌즈 크기가 1m인 이 망원경은 아직도 최대 크기의 굴절망원경으로 남아있다.

헤일의 열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여키스 천문대의 관측 환경이 좋지 않자 더 맑은 하늘을 찾아 캘리포니아 일대를 뒤졌다. 이번에는 또 다른 성공한 사업가 카네기의 지원을 받아 윌슨산에 새로운 천문대를 만들었다. 1904년 천문대를 건설하고 4년 뒤 이곳에는 1.5m의 거울을 가진 대형 망원경이 들어섰다. 이 와중에도 헤일은 더 큰 망원경을 원했다. 1.5m 망원경을 만들면서 성공한 사업가 후커의 자금 지원을 받아 2.5m 망원경 제작에도 착수했다. 미국 관측천문학의 최전선이 이 조지 엘러리 헤일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었다.

여키스 천문대에서 공부를 시작한 허블은 ‘성운’에 관심을 가졌다. 성운(Nebula)는 구름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단어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하늘에서 별과 다르게 보이던 것을 부르는 이 천체들은 점점 학자들 사이 논쟁의 대상으로 급부상하였다. 그저 뿌연 먼지, 구름처럼 보이던 것들이 발전한 기술로 확인해 보니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였다. 단순하게 별이 뭉쳐져 뿌옇게 보이는 것들은 성단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남은 성운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되었다. 별과 관련된 가스 형태로 보이는 성운과 나선팔처럼 보이는 구조를 가진 성운이었다. 허블은 이러한 성운들의 사진을 찍고 위치를 기록하고 형태, 밝기 등을 확인하고 있었다.

1916년. 2.5m 망원경이 완성을 코앞에 두게 되자 윌슨산 천문대에서는 추가적으로 천문학자들을 고용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 추가 채용 추천 명단에 들어간 사람 중 하나가 바로 허블이었다. 이제 허블은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망원경으로 직접 연구할 기회를 코앞에 둔 것이었다. 그러나 허블의 운명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마침 미국이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것이었다. 혈기가 넘치던 허블은 입대를 결심하고 자신이 가기로 한 윌슨산 천문대의 자리를 비워놔 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그리고 학위를 빨리 받기 위해 논문 심사 역시 앞당겼는데 완성도가 높지 않은 논문이었음에도 시카고대학은 참전하는 허블을 배려해 줬다. 프랑스에 파견된 허블은 실제 전투에 참여하기 전 독일이 항복하며 전쟁이 끝나버리고 만다. 그렇게 2년 정도의 군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허블은 1919년, 드디어 윌슨산 천문대로 향했다.

거대한 동료를 만난 허블은 영국식 말투와 군대식 행동이 합쳐져 동료들에게 그리 환영받는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천문학에 대한 열정은 엄청났다. 밤새 2.5m 망원경과 씨름하면서 직접 수백 장에 달하는 사진을 찍어나갔다. 한 장에 5시간 가까이 되는 노출 시간을 가지고 있으니 끈기가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안타까운 점은 사진 완성도는 높은 편이 아니었다.) 그가 2.5m 망원경으로 최초 촬영한 대상 역시 성운이었다. NGC 2261이라 불리는 이 천체는 현재 허블의 변광성운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이렇게 허블이 열심히 연구를 하고 있는 동안 미국 천문학계는 한 가지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1920년 4월,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에서 M31이라 불리는 천체의 정체를 두고 한바탕 토론이 벌어진 것이었다. 허블과 같이 윌슨산 천문대에서 일했던 천문학자 섀플리는 M31이 우리은하 안에 위치한 성운의 일종이라 주장했다. 반면에 릭천문대의 천문학자 커티스는 M31이라는 나선 성운이 우리은하 바깥에 있는 또 다른 은하라고 주장했다. 이 완전히 다른 주장의 결론을 내려면 결정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이런 와중에 1923년 여름부터 허블의 주 관측 대상은 바로 이 M31 성운으로 결정되었다.

허블은 10월 5일부터 7일까지 연달아 M31을 촬영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중 10월 5일 촬영한 사진에서 뭔가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이전 사진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별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이를 신성(NOVA)라 생각하고 사진판에 직접 N이라는 글자를 남겼다. 나선 성운에서 신성을 발견한 것은 허블이 처음이 아니었다. 흔치 않은 현상이기는 하지만 최초는 아니었던 이 천체. 계속해서 사진을 찍고 있던 10월 23일. 허블은 이 별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만약 신성이 맞는다면 갑자기 밝게 보였던 이 천체는 천천히 빛이 사그라들어야 했다. 그런데 이 별은 한번 밝아지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밝기가 변하는 변광성처럼 보였다. 이를 확인하려면 추가적인 관측을 통해 별의 밝기 변화를 확인하면 좋았겠지만 11월부터 윌슨산의 날씨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허블에게는 10월에 촬영한 사진건판들이 있었다. 그 판을 분석한 결과는 고무적이었다. 이 천체는 신성이 아니라 변광성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허블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변광성은 당시 천문학자들의 고민을 해결해 줄 구원자라 볼 수 있는 천체였다. 섀플리와 커티스가 나선 성운을 두고 대논쟁을 했을 때 이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성운까지의 거리였다. 우주에서 거리를 구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중 하버드 천문대의 헨리에타 리비트라는 여성 천문학자가 획기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세페이드 변광성이라는 특정 변광성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허블이 M31에서 찾은 변광성이 바로 이 세페이드 변광성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 나선 성운까지의 거리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 결과에 따라 나선 성운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이었다. 허블의 계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M31 나선 성운까지의 거리는 약 93만 광년이 나왔다. 당시 섀플리를 비롯한 학자들이 생각한 우리은하의 크기인 30만 광년보다 압도적으로 큰 거리였다.
허블의 발견은 정식 논문 제출보다 언론 발표가 먼저 진행되었다. 1924년 11월 22일 뉴욕타임즈가 해당 내용을 “나선 성운이 별들로 이루어진 독립적 체계임을 발견 — 허블 박사, 그것들이 우리은하와 유사한 ‘섬우주’임을 확인하다.”(Finds Spiral Nebulae Are Stellar Systems — Dr. Hubble Confirms View That They Are “Island Universes” Similar to Our Own.) 라는 제목으로 기사화하였다. 곧이어 논문이 발표된 뒤에는 그의 이름이 미국을 떠나 유럽에까지 퍼져나갔다. 그가 천문학계의 전 세계적 스타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허블의 발견은 기사의 제목처럼 우리은하와 유사한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우주의 규모를 엄청나게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은하라는 거대한 구조는 우주 속 무수히 많은 알갱이들 중 하나로 격하되었다. 허블의 관측 결과가 발표된 이후 용어에도 변화가 생겼다. 허블 스스로가 논문에 쓴 ‘Extragalactic Nebulae’(은하 밖 성운)이라는 용어부터 점차 변화하여 galaxy(은하)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제 허블의 주 관심사는 우리은하 속 구름처럼 보이는 성운이 아니었다. 저 먼 우주에 있는 또 다른 ‘은하’들이었다.
허블은 계속해서 은하들을 관측했다. 그가 연구를 시작하기도 전이었던 1912년 10월, 베스토 슬라이퍼라는 천문학자가 M31의 속도를 분석하는데 성공했던 적이 있었다. 허블은 슬라이퍼의 연구를 더 확장시켜 외부은하들의 속도와 거리를 동시에 분석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2.5m 망원경으로도 30시간, 40시간 가까이 찍어가면서 노력한 결과 그는 무언가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929년, ‘외부은하의 거리와 시선속도 관계(A Relation between Distance and Radial Velocity among Extra-Galactic Nebulae)’라는 제목으로 나온 이 논문은 천문학 역사에 손꼽히는 중요한 논문 중 하나가 되었다. 멀리 있을수록 더 빨리 지구에서 멀어져 간다는 사실을 담은 이 논문은 우주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허블은 어쩌면 천문학 역사에서 상당히 많은 행운을 받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천문학이 아닌 다른 분야로 시작을 했음에도, 심지어 기회를 눈앞에 두고 입대라는 다른 길을 선택했음에도 그에게 주어진 것은 당대 최고의 관측 장비였다. 그리고 그가 만든 업적 역시 헨리에타 리비트, 베스토 슬라이퍼 등 선대 천문학자들이 마련한 기틀 위에 세워져 있었다. 얼핏 보면 뛰어난 장비와 탄탄한 선행 연구 위에 세워진 업적으로만 볼 수 있다. 하지만 허블은 그렇게 평가받기엔 너무 큰 족적을 남겼다. 같은 장비를 쓰는 어떤 학자들도 찾지 못한 변광성을 찾아냈으며 긴 시간 끈기를 가지고 관측을 이어가 은하들의 속도, 거리를 측정할 수 있었다. 이는 그가 준비된 인물이었기에 가능한 행운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를 우주 중심에서 끌어내린 것처럼 허블 역시 우리은하를 우주 중심에서 끌어내렸고 우주 팽창을 알아내면서 우주론이라는 학문을 활짝 열었다. 허블은 현대천문학의 시작을 알린 또 하나의 거인이었다.

참고자료
- 에드윈 허블(장헌영 역). 2014. 성운의 왕국. 지식을 만드는 사람들
- 이에 마사노리(김효진 역). 2017. 허블-우주의 심연을 관측하다-. AK
- 이광식. 2018. 천문학 콘서트. 더숲
- 지웅배. 2020. [사이언스] ‘허블 법칙’의 진짜 주인은 허블이 아니다?!. 비즈한국
- 홍성욱. 2024.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69] 현대 우주 탄생 100주년.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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