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배우다 보면 종종 사람의 이름이 붙은 법칙이나 발견물을 찾게 되는 경우가 있다. 보통 가장 먼저 해당 법칙을 알아냈거나 새로운 물질을 처음 발견해낸 사람의 이름이 붙는 경우가 많다. 천문학에서 역시 누가 먼저 무엇을 발견했느냐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 발견했느냐는 역사에 많은 논쟁을 주는 경우가 있다. 19세기 유럽 천문학계를 달군 문제 역시 ‘누가’, ‘먼저’ 했는지가 중요했다. 그리고 그 천문학자들이 발견해낸 대상은 저 하늘에서 태양계의 제일 바깥 행성이 된 푸른빛 행성. ‘해왕성’이었다.

오랜 기간 인류 역사에서 하늘에서 보이는 행성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5개가 전부였다. 이런 오래된 인식은 영국의 음악가였던 윌리엄 허셜이 천왕성을 발견하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발견된 행성은 천문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왔다. 당시의 천문학이 천체의 위치와 움직임에 집중하는 측성학에 가까웠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흥미로운 측정 대상이 눈앞에 떨어진 셈이었다. 뉴턴의 중력 법칙까지 알려진 상황에서 행성의 궤도를 특정하는 것은 지금까지 쭉 해왔던 일의 반복이었다. 그런데 이 천왕성이라는 친구는 뭔가 이상했다.
천왕성은 토성보다 바깥 궤도를 돌기 때문에 지구에서 봤을 때 그 움직임이 매우 느리다. 공전 주기가 무려 84년이기 때문에 오래 관측을 해도 궤도의 극히 일부 밖에 알아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천문학자들은 과거의 관측 기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현재 가지고 있는 데이터로 궤도를 역산해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낸다. 그리고 그때의 관측 기록 속에 천왕성으로 의심되는 천체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을 통해 1690년 영국의 존 플램스티드의 관측 기록, 1753년 제임스 브래들리의 관측 기록 등 20개 가까이 되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프랑스의 천문학자 샤를 르 모니에는 무려 9번 이상 천왕성을 관측했음이 드러났다. 이 중 일부는 한 달 사이에 연이어 관측했던 것으로 조금만 더 신중했다면 천왕성의 최초 발견자는 모니에가 될 수도 있었던 수준이었다.

자료가 많이 쌓였다. 프랑스의 천문학자 알렉시 부바르는 목성과 토성의 천문표를 만든 행성 궤도의 전문가였다. 이 천문표는 행성의 궤도를 계산하여 어느 시점에 어느 위치에 행성이 있어야 하는지 계산한 예측표라 볼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천왕성의 천문표를 만드는 것도 부바르의 목표였다. 그런데 부바르가 궤도를 계산함에 있어서 관측 자료와 일치하지 않는 이상한 현상이 자꾸 발생했다. 과거의 관측 기록을 토대로 궤도를 계산하면 최신 관측 기록과 오차를 보였고 최신 기록을 토대로 만든 궤도는 과거 관측 기록과 맞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그는 과거의 관측 기록이 부정확했을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최신 관측 자료에 더 가중치를 두고 궤도를 계산했다.
이후 천왕성 관측이 계속되면서 부바르의 천왕성 천문표와 실제 천왕성이 다른 움직임을 보인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그 오차가 고작 몇 초각 정도의 작은 부분이었지만 부바르의 이전 천문표인 목성과 토성은 매우 정밀한 정확도를 자랑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분명 문제가 있었다. 그렇다면 뭐가 원인일까. 부바르가 생각한 대로 관측 자체의 부정확함일까? 그러기에는 현재 관측 기록으로도 오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음은 계산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행성의 움직임에는 태양과 행성의 중력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인접한 다른 행성의 중력도 궤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목성과 토성의 영향력을 잘못 계산한 것이 아닐까? 계산조차 틀리지 않았다면 그다음 결론은 더욱더 무서운 말이 된다. 이 모든 계산을 가능하게 만든 뉴턴의 역학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 결론은 천문학자들에게 최후의 최후에 살펴봐야 하는 부분이었다. 그런 와중에 새로운 주장이 나온다. 이는 부바르 자신조차 의심했던 것으로 천왕성 바깥에 이 행성을 잡아당기는 또 다른 행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왕성의 이 이상한 움직임을 해석할 수 있다. 과연 행성이 하나 더 존재하는 것일까?
1821년 부바르의 천문표가 등장하고 약 20년이 지나도록 이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841년, 천문학 최대 난제로 떠오른 천왕성 궤도 문제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학부생 한 명이 뛰어들었다. 그의 이름은 존 카우치 애덤스. 수학을 전공하던 학생이었다. 우연히 천문학계의 난제를 알게 된 그는 곧바로 이 내용에 매료되었다. 평소 천문학에도 관심이 많던 그는 학부를 졸업하는 1843년까지 잠시 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유예했다. 매우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에 성공하고 돌아온 애덤스는 이제 본격적으로 천왕성 문제에 뛰어들었다.

애덤스가 문제 해결을 위해 택한 방법은 천왕성의 오차를 활용하여 미지의 행성의 위치를 특정하는 ‘역산’ 방법이었다. 기존에 천체 역학은 천체의 궤도, 질량, 위치 등을 고려하여 다른 천체에 미치는 영향을 계산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애덤스는 천왕성 바깥에 있는 천체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정보에 추정치를 넣어 일일이 계산을 했다. 계산으로 나온 결과를 대입했을 때 실제 천왕성 궤도에 영향을 얼마나 주는지, 그 영향이 실제 관측 값과 일치하는지 하나하나 따져본 것이다. 물론 미지수가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애덤스는 한 가지 값은 특정하고 계산에 들어갔다. 태양부터 행성까지의 거리가 그 값이었다. 마침 당시 천왕성 발견 이후 행성까지의 거리 규칙으로 알려진 티티우스-보데 법칙이 잘 알려진 상황이었다. 그 법칙에 따르면 천왕성 바깥 천체는 대략 38AU 즈음이라고 가정할 수 있었다. 애덤스는 끝없는 계산의 늪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갔다.
계산을 이어갈수록 애덤스는 더 정확한 관측 자료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아무리 계산을 해도 실제 관측 값을 얻을 수 없다면 확인이 불가능했다. 이를 위해 케임브리지 천문대장이었던 제임스 챌리스에게 해당 값을 요청한다. 챌리스는 애덤스의 요청을 들어주어 그리니치 천문대에 있는 왕실 천문학자인 비델 에어리에게 편지를 보냈다. 에어리는 애덤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리니치 천문대의 정밀한 관측 자료가 애덤스의 손에 들어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845년 가을. 상당히 그럴듯한 계산 값을 얻어냈다. 이제 이 값이 나타내는 방향으로 망원경을 돌려 찾아내는 작업이 필요했다. 애덤스는 자신의 결과를 담은 편지를 챌리스에게 보냈다. 이제 한 걸음만 남았다.

영국에서 애덤스가 홀로 고군분투를 하고 있을 때, 프랑스 천문학계 역시 천왕성 문제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이때 나선 인물이 당시 프랑스에서 천체역학 분야의 떠오르는 신성이었던 위르뱅 르베리에였다. 파리 천문대장의 권유로 천왕성 문제에 뛰어든 르베리에는 먼저 미지의 행성을 찾기보다 목성, 토성의 중력 계산을 정밀하게 다시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오차의 원인이 천왕성 바깥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곧바로 행성 위치를 찾아내기 위해 르베리에 역시 애덤스처럼 거리 값 하나만 고정하고 나머지 질량과 궤도 요소를 하나하나 계산해나갔다. 영국보다 늦었지만 프랑스 역시 천왕성 바깥을 향해 수학이라는 무기를 들이대고 있었다.

애덤스의 편지를 받은 챌리스는 왕실 천문학자 에어리에게 이 결과를 보여주는 것을 추천했다. 애덤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직접 에어리를 만나러 떠났다. 하지만 먼저 방문을 알리지 않고 찾아오는 바람에 에어리와 시간이 맞지 않아 대면에는 실패하고 결과를 문서로만 남겨야 했다. 후에 해당 문서를 받은 에어리는 곧바로 관측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니치 천문대의 존재 목적은 미지의 행성 탐사가 아니라 항해와 시간 측정에 필요한 정밀한 천체 관측이었다. 이런 목표를 미루고 애덤스의 말 하나만 믿고 망원경을 돌리기에는 리스크가 크다고 생각한 것이다. 거기에 의문점도 하나 남아있었다. 천왕성에서 나타나는 오차는 예상보다 앞에 있는지 뒤에 있는지(황경 차이) 뿐 아니라 태양과 천왕성 사이 거리에도 있었다. 에어리는 애덤스에게 그의 계산이 이 차이까지 해결할 수 있는지 편지로 물었다. 그에게는 완벽한 확신이 있어야 움직일 명분이 생기는 상황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애덤스는 이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문점을 풀어줄 답장도 하지 않았으니 에어리의 의심만 커져갔다. 그렇게 애덤스의 계산은 빛을 보지 못하고 먼지만 쌓이고 있었다. 그 먼지를 거둬준 것은 프랑스에서 자신의 계산 결과를 발표한 르베리에였다.
르베리에의 계산 논문을 전달받은 에어리는 애덤스의 계산 결과와 비교해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계산은 얼추 비슷한 결과를 만들고 있었다. 에어리는 애덤스에게 받지 못한 천왕성 거리 문제에 대한 답을 르베리에에게도 보냈다. 르베리에는 자신의 계산이 천왕성의 거리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음을 보장했다. 에어리에게 명분이 생겼다. 1846년 7월, 그는 케임브리지 천문대장 챌리스에게 미지의 행성 탐사를 요청했다. 드디어 천왕성 바깥에 있을지 모를 행성을 향해 망원경이 옮겨졌다. 챌리스는 수천 개의 별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제 행성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르베리에 역시 자신의 계산 결과를 세상에 공표하면서 프랑스의 천문대들이 관측에 뛰어들기를 바랐다. 문제는 프랑스 천문학계 역시 에어리처럼 자신들의 기존 업무를 두고 확신이 없는 일에 뛰어들기를 꺼려 했다. 그들에게는 애덤스의 계산 결과가 없으니 교차 검증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없었다. 자신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 주길 요청했던 파리 천문대 대장인 아라고 역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르베리에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이전에 관측 연구 논문을 자신에게 보낸 적이 있었던 베를린 천문대의 요한 갈레가 그 적임자였다. 9월 18일, 르베리에는 자신의 계산 값과 함께 관측을 요청하는 편지를 갈레에게 발송했다. 5일 후 9월 23일. 갈레는 편지를 받았다.

당시 베를린 천문대장이었던 천문학자 요한 엥케 역시 이 업무를 그리 반기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지정한 위치가 상당히 구체적이었고 갈레가 긴 시간을 들여 행성 찾기를 진행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짧게 해보겠다 정도의 의견을 보여 그날 밤 관측이 허가되었다. 갈레와 학생이었던 하인리히 다레스트라는 조수가 그날 밤 망원경 앞에 모였다. 망원경으로 르베리에가 계산해낸 위치를 확인했지만 행성으로 보이는 것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때 다레스트가 아이디어를 하나 냈다. 눈으로 행성을 구별하려 하지 말고 당시 최신 별 지도가 베를린 천문대에 있으니 이 별 지도와 지금 보이는 별을 하나씩 비교해 보자는 것이었다.
갈레는 망원경에 눈을 대고 보이는 별의 위치를 하나씩 말하기 시작했다. 다레스트는 별지도를 보면서 해당 별과 위치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작업을 시작한 지 30분이 지났을 무렵, 별 지도에 없는 8등급 정도의 별이 하나 등장했다. 갈레와 다레스트는 아직 기뻐하긴 이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음 날. 해당 별의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다른 별과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드디어 천왕성을 괴롭히던 미지의 행성을 찾아낸 순간이었다. 그들이 찾아낸 위치는 르베리에의 계산에서 약 1°의 차이만 가지고 있었다.

르베리에와 갈레, 다레스트의 쾌거는 전 유럽을 강타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영국에 더 크게 날아들었다. 심지어 챌리스는 자신의 관측 기록을 살펴보다가 1846년 8월에 이미 미지의 행성을 관측했음을 확인했다. 거기에 7월 30일과 8월 12일 관측 자료를 비교하다가 39번째 별까지만 진행했는데 미지의 행성은 그 자료에서 49번째 목록에 있었다. 조금 더 데이터 분석을 자세히 했다면 르베리에보다 먼저 애덤스의 계산 결과로 행성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 때문에 존 허셜을 비롯한 영국의 천문학자들은 애덤스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이어갔다. 반대로 프랑스 천문학자들은 그야말로 황당한 소리라며 비난을 이어갔다. 특히 파리 천문대의 아라고는 발견 전에 계산 결과를 발표하지도 않았고 관측에 성공하지도 않은 자가 영예를 가져가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마치 국가 간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가던 이 상황에서 정작 당사자인 애덤스는 덤덤했다.
애덤스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공식 발표하면서 자신의 계산이 먼저 이루어졌지만 이것이 르베리에의 업적을 빼앗을 수 없다는 취지의 내용을 담았다. 후에 르베리에와 직접 만남을 가지기도 했는데 정작 두 사람은 서로의 계산을 인정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속 연구를 통해 두 사람의 계산에 공통적으로 이상한 점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해왕성까지의 거리가 두 사람이 고정시켜 놓은 값인 38AU가 아닌 약 30AU 가량이었던 것이다. 티티우스-보데 법칙을 무너지게 만든 이 거리는 분명히 강력한 오차였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어떻게 틀린 값으로 정확한 위치를 측정한 것일까. 사실 그들이 계산한 것은 사실 해왕성의 정확한 궤도 그 자체가 아니었다. 실제보다 먼 곳에 행성을 놓은 대신 질량을 더 크게 잡는 등 여러 궤도요소를 조정하여 당시까지 관측된 천왕성의 움직임을 비슷하게 만들어낼 수 있었다. 여러 가능한 해 가운데 두 사람의 계산이 흥미롭게도 1846년 당시 실제 해왕성이 있던 방향과 가까웠던 것이다.
훗날 해왕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미지의 행성을 찾는 여정에는 당시 유럽 천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여러 사람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단순하게 ‘위치를 예측하고 행성을 발견했다.’라는 한 줄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수많은 반복 계산과 우연이 섞인 흥미로운 발견 레이스였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는 것은 해왕성 발견 이후로 계속 되어왔다. 명왕성이 발견되어 잠시나마 태양계 행성의 막내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다른 별의 행성, 심지어 위성을 발견하는 경지에까지 다다랐다. 애덤스와 르베리에 레이스의 유산은 단순하게 ‘누가’, ‘먼저’ 발견했느냐라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낼 것인가라는 방법을 제시한 아주 멋진 이론의 승리가 아니었을까.
참고자료
- 톰 스탠디지. 2000. The Neptune File
- 이광식. 2018. 천문학 콘서트. 더숲
- 윌리엄 시한, 리처드 바움. 2002. Neptune’s discovery. Astronomy.com
- 존 유리. 2021. 175 Years Ago: Astronomers Discover Neptune, the Eighth Planet. NASA
- 2021. The history behind the AIP logo. A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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