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어렵지만 그 일을 선택하는 과정 자체도 고난과 고민의 연속이다. 항상 여러 선택지 속에서 우리의 삶을 걸고 매 순간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우리의 삶일 것이다. 그리고 선택하지 못한 길에 후회하는 경우 또한 자주 있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해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두 방향 모두를 취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천문학자는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그리고 그 이름은 천문학사에 깊게 새겨지게 되었다.

1928년에 태어난 베라 쿠퍼는 10대 시절 집이 워싱턴 D.C로 이사를 오면서 가장 작은방을 받게 되었다. 공부를 더 잘하는 언니에게 밀려 받은 방 창문은 북향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 방에서 보게 된 것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별들이었다. 이는 그녀가 천문학이라는 학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어린 소녀의 눈에 들어온 별이 그녀 인생의 평생 길잡이가 되어 준 순간이었다.
그녀가 천문학의 길을 걷기에 시대가 그리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대학 입학 당시 천문학이 아니라 별을 그리는 삽화가가 되는 것이 어떤가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선택한 대학교는 당시 여성 대학교였던 바사 대학이었다. 바사 대학은 미국 최초의 여성 천문학교수였던 마리아 미첼을 임명했던 것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천문학의 꿈을 키우던 그녀는 운명적 사랑을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과학자였던 (그리고 지금도 천재로 불리는) 리처드 파인만 코넬대 교수와 그 연구팀이 바사 대학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연구팀에 속해있던 로버트 루빈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결혼을 통해 베라 쿠퍼에서 베라 루빈이 된 그녀는 이제 학사 학위를 마치고 다음 단계를 밟아야 했다. 그녀의 선택은 남편의 학교인 코넬 대학교였다. (사실 코넬 대학교는 천문학과의 규모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프린스턴 대학의 경우 여성을 아예 학생으로 받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합격했던 하버드 대학이 아닌 코넬을 선택한 것은 가정을 생각한 경우라 볼 수 있다.)

그렇게 천문학자의 길을 밟고 있던 그녀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회전’이었다. 어린 시절 창밖으로 바라보던 별들의 회전처럼 우주에 있을지 모를 더 큰 규모의 회전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달은 지구 주변을 회전한다. 지구는 태양 주변을 회전한다. 태양은 은하 중심으로 회전한다. 그렇다면 이 은하들 역시 무언가를 중심으로 회전하지 않을까? 점점 확장해왔던 우주의 구조를 떠올려보면 그녀의 생각은 타당한 면이 분명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그녀 혼자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남편이 가져다준 네이쳐 지에 실려 있는 논문 한 편은 제목부터가 ‘회전하는 우주’였다. 이름 없는 인물의 작품도 아니었다. 이 논문을 작성한 이는 조지 워싱턴 대학의 교수였던 조지 가모프였다.

그녀는 야심찬 자신의 계획을 하나씩 진행해 나갔다. 다른 학자들이 수집한 108개의 은하의 움직임 데이터를 모았다. 만약 우주가 하나의 중심점을 가지고 회전하고 있다면 이 은하들의 움직임을 분석했을 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어야 했다. 생각했던 것만큼 완벽한 회전의 형태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 수준 정도면 발표를 할만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녀의 발표는 1950년 12월, 하버포드에서 열리는 AAS(미국 천문 학회)에서 있을 예정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그녀가 만삭이라는 점이었다. 심지어 발표 한 달 전, 첫아이가 태어났다. 교수 중 한 명은 자신이 대신 발표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의 아버지에게 운전을 부탁하여 신생아인 자신의 아들을 포함한 온 가족이 눈밭을 뚫고 350km가 넘는 길을 건넜다. 그렇게 학회에 도착했다.
고작 10분 남짓한 발표 시간이었다. 온 우주의 회전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가진 이 발표는 청중의 호응을 끌어내는 것에 실패했다. 아니 오히려 부정적인 쪽으로 집중되었다. 제목의 무게를 그녀의 데이터가 지탱하기에는 터무니없이 허약했다. 그나마 저명한 천문학자였던 마르틴 슈바르츠실트(블랙홀 이론의 기초를 다진 카를 슈바르츠실트의 아들이다.)만이 보완이 많이 필요하지만 시도 자체는 좋았다는 식으로 두둔해 줬다. 그녀의 첫 천문학 무대 진출은 성공이라고 말하기에 조금 부족했다.
그렇다면 당시 전 세계 천문학계에서는 무엇이 더 중요한 문제였을까. 1929년 허블이 다른 은하에 대한 개념을 확인하면서 더 먼 우주를 향한 관측이 활발해졌다. 관측 장비의 발전으로 저 먼 은하의 움직임까지 구별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은하 안에 위치한 별 뿐 아니라 은하 그 자체를 연구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그 와중에 이상한 문제가 하나 수면 위로 떠올랐다. 1932년, 네덜란드의 천문학자 얀 오르트는 우리은하의 질량이 보이는 것보다 커 보인다는 의견을 내보였다. 당시에는 측정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 많았는데 이 내용을 1937년 스위스의 괴짜 천문학자 프리츠 츠비키가 다시 받았다. 그는 은하가 모여있는 은하단을 조사하면서 다시 한번 보이는 것보다 은하들의 질량이 상당히 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이것이 무언가 보이지 않는 물질이 있다고 표현했다. 분명 고려해 볼 만한 내용이었지만 츠비키의 특이 성격으로 인해 적이 많아서 그런지 바로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래도 문제가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은하에는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렇게 천문학계의 중요 문제 중 하나로 은하가 떠오를 준비를 할 때 베라 루빈은 천문학이라는 길에서 떠나 있었다. 코넬 대학에서 석사를 마친 이후 박사를 딴 남편의 직장을 따라 다시 워싱턴 D.C로 이사하게 된다. 남편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천문학자의 길이 아닌 전업주부의 길로 완전히 들어선 그녀였다. 이렇게 우편으로 배달된 천문학 학술지를 읽으며 슬퍼하던 그녀는 다시 천문학자를 향한 삶의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근처에서 유일하게 야간 수업이 가능했으며 또 유일하게 천문학 박사 과정이 있었던 조지타운 대학에 들어가게 된다. 매 저녁마다 남편인 로버트는 그녀를 학교에 바래다주고 기다렸다가 다시 집으로 같이 돌아가는 일을 반복했다.
베라 루빈의 박사과정 지도 교수는 특이하게도 조지타운 대학 소속이 아니었다. 그녀의 야심 찼던 첫 발표 주제. 우주의 회전에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자 조지타운 주변에 위치한 조지 워싱턴 대의 조지 가모프였다. 그는 성실하고 매너 있는 인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술을 마시고 강연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발표에 졸고 있는 등 이상한 행동을 자주 보였으나 천문학에 한해서 그 통찰력 만큼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의 지도 아래 은하의 분포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연구했다. 중간중간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며 네 아이의 어머니가 된 그녀는 1954년, 드디어 박사 학위 논문을 출판했다. 이제 그녀는 천문학자가 되었다.
네 아이를 키우면서 모교 조지타운 대학의 조교수를 지내던 그녀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연구의 세계에 뛰어들기로 한 것이다. 대학을 떠나 카네기 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그녀는 그곳에서 뛰어난 기기 제작자였던 천문학자 켄트 포드를 만났다. 당시 최초로 발견되어 가장 핫한 주제가 되었던 퀘이사를 관측하고 분석하면서 주류 천문학계의 입구로 들어선 그녀는 금방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주제는 또 ‘회전’이었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은하인 안드로메다 속 별의 회전이었다.

은하 속 별을 포드의 분광기를 사용하여 분해한 결과 두 사람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중력을 생각하면 중심에서 가까울수록 회전이 빠르고 멀수록 회전이 느려진다는 점은 당연한 이야기다. 실제 태양계 안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수성이 빠르게 공전하고 바깥에 있는 해왕성이 느리게 공전한다. 이를 생각하면 안드로메다은하 속 별도 중심부에서는 회전이 빠르고 바깥 부분에서는 느려야 했다. 그런데 루빈과 포드의 측정 결과 그 속도는 큰 차이가 없었다. 이 이상한 현상을 1968년 12월, 천문 학회에서 발표했다. 그녀가 처음 천문 학회에서 우주의 회전을 이야기한지 18년이 지났다. 좀 더 경험과 능력이 채워진 그녀의 이번 발표는 동료 학자들의 움직임을 이끌어냈다. 당시 저명한 천문학자였던 루돌프 민코프스키(아인슈타인의 지도 교수였던 헤르만 민코프스키의 조카이다.)는 해당 내용의 논문을 빨리 제출해달라 요구했을 정도였다.

안드로메다은하의 회전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논문은 1970년 2월, 천체물리학 저널에 발표되었다. 이후 루빈과 포드 말고도 여러 천문학자가 이 내용과 관련된 연구에 뛰어들었다. 전파를 이용한 연구에서도 회전 속도는 큰 차이가 없었다. 츠비키가 언급한 암흑물질이 다시 튀어나왔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것이 은하 회전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1980년대 들어서 학계는 보이지 않는 암흑 물질의 존재에 대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우주의 대부분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무언가였다.

베라 루빈은 변두리 천문학자에서 세계적인 거장 천문학자로 거듭났다. 그녀는 계속 연구를 이어갔고 1993년, 클린턴 대통령에게 직접 국가 과학 메달을 수여받았으며 1996년에는 영국에서 왕립천문학회 금메달을 받았다. (1828년 캐롤라인 허셜 이후로 168년 만에 여성 천문학자가 받은 금메달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네 자녀는 장성하여 모두 학자의 길을 걸었다. 유일한 딸이었던 주디스 영은 어머니와 같은 천문학자의 길을 걸었고 모녀가 같이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렇게 여성으로서만이 아니라 학자로서 위대한 길을 걷던 그녀는 2016년 크리스마스, 88세의 나이로 저 은하 속 별이 되었다.

과학자 루빈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 이름은 길게 남을 예정이다. 현재 칠레에 지어지고 있는 8.4m 거대 망원경의 이름은 베라 루빈 망원경이 되었다. 기존 LSST(대형 시놉틱 관측 망원경)이라 부르던 것을 그녀의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무려 32억 화소의 카메라를 가진 이 망원경은 넓은 지역을 동시에 촬영할 수 있는 탁월한 성능으로 암흑물질 등의 연구에 활용될 예정이다. 이뿐이 아니다. 2024년, 세계적인 기업 엔비디아는 자신들의 차세대 AI 칩에 루빈의 이름을 붙였다. 거기에 자체 CPU에는 베라라는 이름이 붙어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그녀의 이름이 곳곳에 남아 퍼지고 있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항상 곧은 직선 주로만 달릴 수는 없다. 구불구불 휘어진 길 위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갈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볼지 그 선택이 항상 우리를 기다린다. 베라 루빈은 천문학이라는 힘겨운 길에서 어머니라는 또 다른 길을 만났다. 그리고 그 1950년대 사람이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대담하게 두 길을 모두 선택했다. 평생 우주의 회전, 은하의 회전을 바라보던 그녀가 자신의 삶도 두 갈래를 회전하며 걸어갔다는 점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긴 시간 자신의 연구뿐 아니라 밖에서는 동료, 후배 여성 과학자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집에서는 아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그녀의 일생 자체가 거대한 폭풍, 회전이었던 것은 아닐까.

참고자료
- 리처드 파넥 (김혜원 역). 2013. 4퍼센트 우주. 시공사
- 곽재식. 2019. 우리가 과학을 사랑하는 법. 위즈덤하우스
- 막달레나 허기타이 (한국여성과총 역). 2019. 내가 만난 여성 과학자들. 해나무
- 데이비드 아이허 (최가영 역). 2017. 뉴 코스모스. 예문아카이브
- 정인철. 2017. [사이언스] 여성 과학자로 산다는 것에 대하여. 비즈한국
- 심창섭. 2020. 여성 과학자 이름이 붙은 거대망원경. The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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