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과학사: 별들의 춤을 감상하는 방법

 우리가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별이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 모습을 보고 오랜 옛날부터 고대인들은 하늘에 있는 별은 일정하게 움직인다고 생각하며 우주관을 만들어왔다. 하지만 실제로 그 움직임은 별이 아닌 지구에 있었다. 이 사실을 알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면 저 하늘의 별들은 모두 붙박이처럼 먼 우주에 박혀있는 것일까.

고대의 우주관을 표현한 그림. 하늘의 뚜껑에 별이 박혀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실 이 모든 별은 각각의 춤사위를 보여주고 있다. 단지 여러 방면으로 움직이는 이 우주의 춤을 보기에 우리는 너무 먼 곳에 있다.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1m 움직이는 것은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서울에서 부산 위치에 있는 사람이 1m 움직이는 것은 감지하기 너무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런 어려움에도 우리는 별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은하가 어떤 방향으로 회전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 바로 1842년 5월 25일, 프라하의 왕립 보헤미안 과학 협회에서 오스트리아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였던 크리스티안 도플러가 발표한 한 이론이 그 열쇠를 쥐고 있었다. 우리는 그 이론의 이름을 ‘도플러 효과’라 부른다.

크리스티안 도플러의 사진 (사진: 크리스티안 도플러 재단)


 1803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도플러는 오랜 석공 집안의 후손이었다. 그 역시 가업을 이어나가기 위한 교육을 받으려 했으나 어린 시절부터 좋지 않았던 건강이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잘츠부르크의 수학자이자 교사였던 사이먼 스템퍼는 도플러가 수학과 과학 분야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스템퍼는 도플러의 아버지를 설득하여 그가 가업을 이어가는 것이 아닌 새로운 길을 걷도록 했다. 그렇게 빈 왕립 폴리테크닉 대학(지금의 빈 공과대학)에서 물리와 수학을 공부한 도플러는 모교에서 수학 조교로 생활하고 있었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든 도플러에게 이런 연구 생활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에게는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했다.

잘츠부르크에 위치한 도플러의 생가. 현재 도플러 기념관이 되어 있다.


 도플러가 선택한 것은 다른 세상. 미국으로의 이민이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가산을 정리하고 미국 영사관을 방문하는 등 이민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하던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프라하의 학교 교사 자리를 제안받은 그는 미국 대신 체코로 떠나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기회는 그의 인생을 새로운 방향으로 바꿨다. 결혼도 하고 프라하 공과대학의 교수 자리까지 얻은 그에게는 수많은 연구가 눈앞에 남아있었다. 그중 물리학적으로 그의 시선을 끌었던 것은 ‘별빛의 수차’였다.

제임스 브래들리가 선택했던 별자리인 용자리의 모습. 엘타닌은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봤을 때 거의 머리 위까지 떠오르는 별이었다. 천정 위치에 있는 별이 관측도 용이하고 지구 공전의 영향 이외 다른 오차 요인이 적기 때문에 엘타닌이 선택되었다. (사진: 홍천 별농부 매픽맨 선생님)


 도플러가 살았던 1800년대에는 빛에 대한 새로운 성질이 막 밝혀지고 있던 시기였다. 1727년 영국의 천문학자 제임스 브래들리는 용자리의 별인 엘타닌을 관측하면서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별이 조금씩 움직인다는 점을 발견한 것이다. 애초에 브래들리가 엘타닌을 관측한 이유는 연주시차를 측정하여 지구 공전의 증거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가 측정한 별의 움직임은 시차라고 하기엔 너무 컸고 방향도 이상했다. 마치 별이 작고 눌린 원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브래들리는 이 현상이 지구가 움직이면서 별빛을 받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비가 오는 날 우산을 들고 달리면 바람이 불지 않아도 비가 비스듬히 들이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별빛 역시 움직이는 지구에서 보게 되면 기울어져서 들어오는 것처럼 확인된다. 이를 ‘광행차’라 부른다.

간단한 광행차 설명 그림. 지구의 움직임에 따라 별이 보이는 위치가 달라진다.


 광행차가 발견된 후에도 빛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었다. 1801년에는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의사였던 토마스 영이 이중슬릿 실험을 통해 빛이 파동의 성질을 보인다는 점을 확인시켰다. 1819년, 프랑스의 오귀스탱 프레넬은 빛의 파동성으로 회절 현상을 설명하는 것에 성공했다. 뉴턴 이후 이어져 온 빛의 입자설에 대항하여 파동이라는 증거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도플러는 이런 상황 속에서 새로운 개념을 생각했다. 빛이 파동이라면 지구에서 파동을 연구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 빛에서도 나타나야 했다. 물에 손가락을 넣고 움직이면 앞에는 좁은 물결, 뒤에는 넓은 물결이 나타난다. 파도 역시 파동이기 때문에 빛에서도 움직임에 따라 이런 결과가 나와야 했다. 도플러는 지구가 움직이면서 별에서 날아오는 빛이 다르게 보일 것이라 생각했다.

소방차가 움직일 때 소리의 파장이 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간단한 그림. (사진: NASA/JPL)

 1842년, 프라하 공과대학의 교수 자리까지 올라간 도플러는 5월 25일, 단 5명의 학회 회원이 있는 앞에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발표 몇 달 후 ‘천국의 쌍성과 다른 항성의 색광에 관하여(On the Coloured Light of the Double Stars and Certain Other Stars of the Heavens)’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이 연구는 대상이 우리에게 가까워지면 빛의 파동이 짧아지고 멀어지면 파동이 길어진다는 생각을 담고 있었다. 여기에 추가로 빛의 파동이 변화하면서 색이 달라질 것이라는 개념도 포함되었다. 지구로 다가오면 푸른빛, 멀어지면 붉은빛이 된다는 의미였다. 이론대로라면 쌍성의 경우 한 별이 지구로 다가오고 남은 한 별이 지구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각 별이 푸른빛과 붉은빛으로 보여야 했다. 훗날 도플러의 이름을 따 ‘도플러 효과’라 불리는 현상의 첫 등장이었다.

도플러 논문의 표지


 도플러가 해당 연구를 발표한 이후 다른 학자들이 이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비판적인 접근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네덜란드의 기상학자였던 크리스토프 바이스 발롯은 1845년 2월, 도플러 효과를 확인하기 위한 실험을 진행하려 했다. 증기기관차에 음악가들을 태우고 특정 음을 내도록 한다. 이 음을 기차 바깥에 있는 음악가들이 듣는 방식이었다. 도플러 효과가 맞는다면 기차가 움직이면서 들린 음의 높낮이가 달라져야 했다. 야심 차게 준비한 실험은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말았다. 추운 겨울의 눈보라 때문에 지붕이 없는 열차 칸에서 음을 연주해야 했던 연주자들이 제대로 악기를 다루지도 못했다. 결국 이 실험은 시간이 지나 같은 해 6월 다시 진행되었다. 따뜻해진 날씨 속에 진행된 실험 결과는 명확했다. 음의 높낮이가 달라졌다. 도플러 효과를 소리로 증명한 것이다.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 지역에 그려진 발롯의 실험 벽화. 도플러 효과를 증명했음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발롯은 도플러 효과를 비판하는 쪽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진행한 실험은 소리에 한하여 옳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도플러의 이론에 대해 여전히 비판의 목소리가 많았다. 소리와 빛은 다르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선두에 서 있던 사람은 빈 대학교의 수학 교수였던 요제프 페츠발이었다. 그가 도플러와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한 것은 도플러 효과에 대한 내용이 발표되고 약 10년가량이 지난 후부터였다. 그들의 운명은 1848년 전 유럽을 휩쓴 혁명부터 얽히기 시작했다.

요제프 페츠발의 초상화


 1848년 1월,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서 시작된 혁명의 바람은 파리를 거쳐 베를린과 빈까지 휘몰아쳤다. 이 혁명으로 인해 오스트리아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게 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여러 현안 중 교육 개혁에 관심을 가졌다. 그 일환으로 설립된 것이 오스트리아 최초의 물리학 연구소였다. 1850년, 마침 프라하를 떠나 빈에서 자리를 잡은 도플러는 이 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빈의 과학계 중심으로 접근한 그는 떠오르는 새 학문이던 사진술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사람은 바로 페츠발이었다. 사진술과 관련된 상을 만들려던 도플러의 노력은 금방 물거품이 되었다. 이어서 페츠발은 도플러의 이론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1912년의 빈 물리학 연구소 건물 모습. 도플러가 초대 연구소장으로 있었던 짧은 시간 동안 가르쳤던 제자 중 한 명이 훗날 유전학의 아버지가 되는 그레고어 멘델이었다. (사진:빈 공과대학교)


 1852년 1월. 페츠발은 도플러 효과를 일방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간단한 식으로만 표현된 도플러 효과를 보면서 미분방정식조차 쓰지 않은 방식으로는 위대한 과학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공격에 대해 도플러는 이미 관찰된 현상임에도 미분방정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현실이 아닌 것으로 부정되어야 하냐면서 자신의 이론을 변호했다. 이미 발롯뿐 아니라 여러 실험에 의해 소리의 도플러 효과 현상이 증명되었음에도 학계의 반응은 냉담했다. 같은 해 10월 21일, 해당 논쟁에 관한 학회가 다시 한번 열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도플러는 이 학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계속된 과학적 논쟁에 지친 그는 결핵에 걸리는 등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학회로 가지 못하고 베니스로 요양을 떠난 도플러를 두고 다른 학자들은 그가 패배 선언을 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빈에서 도플러 효과는 패배한 학문이 되고 말았다. 도플러는 얼마 후 물리학 연구소장에서 물러났으며 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1901년, 빈 대학교에서는 페츠발과 도플러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두 사람의 기념비와 흉상이 각각 같은 시기에 제작되어 공개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이러니하다.


 사실 도플러 효과는 그 당시 입장에서 문제점이 여러 곳에서 보이는 이론이기는 했다. 별빛이 움직임 때문에 달라진다는 생각은 당시 관측으로 확인이 불가능했다. 실제 별의 색은 온도에 더 관련이 있었으며 도플러 효과로 인한 색의 변화를 보려면 그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커야만 했다. 결국 미세한 변화를 확인하려면 분광 기술을 통해 스펙트럼을 확인해야 했지만 마찬가지로 그 당시 기술로는 요원한 일이었다. 이런 몇몇 문제들이 커지면서 도플러 효과는 인정받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그가 사망한 후 페츠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부 도플러 효과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였던 에른스트 마흐(우리가 속도의 단위로 쓰는 마하가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는 발롯의 실험보다 정밀한 설계를 통해 도플러 효과가 소리에서 분명히 존재함을 보였다. 이후 독일의 천문학자 헤르만 보겔은 스펙트럼에서 도플러 효과를 확인하였고 이를 이용하여 50개 이상의 별의 속도 데이터를 얻어냈다. 결국 도플러 효과는 50년 가까이 시간을 건너 부활한 것이다.

1890년에 촬영된 별의 스펙트럼.


 도플러 효과는 정작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논란의 대상이었지 대단한 업적으로 남기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도플러 효과는 이후 천문학 역사 여러 방면에서 활약했다. 다른 별에 행성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방법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도플러 효과였다. 외계행성이라는 분야는 그야말로 이 효과가 열어놓은 것이었다. 암흑물질의 존재를 알려준 은하 속 별의 회전 속도 연구 역시 도플러 효과의 도움을 받았다. 현대 우주론, 천문학의 다음 미스터리마저도 도플러 효과가 열었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별을 관측함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이 색과 밝기뿐이었던 시절에서 그 운동까지 확인할 수 있게 해준 것은 물리적으로 연구할 방법을 획기적으로 늘려준 대사건이나 다름없었다.

도플러 효과를 이용하여 외계행성을 찾는 방법을 간단하게 설명한다. 별이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모습을 도플러 효과로 관측하면서 외계행성과 중심별이 어떤 중력적 관계를 가지는지 알아낼 수 있다.


 심지어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천문학 분야뿐 아니라 혈류 속도를 측정하여 의학 분야에도 사용되고 과속 단속, 레이더 기술, GPS 기술, 바람 속도 측정 등의 기상 관측 분야, 음향 기술 같은 여러 과학, 공학 분야에 걸쳐 활용되고 있다. 우리 일상 속에서 도플러 효과는 아주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던 것이다. 실제 아인슈타인은 강연 도중 ‘전자기 이론이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더라도 도플러 효과의 원리는 확실히 남아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이다.

 어떠한 이론이라도 등장과 동시에 모든 사람의 찬사를 받고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도플러 역시 그러한 삶을 살았고 그 생전에 이론의 효용성이 완벽하게 드러난 적은 없었다. 그렇게 공격을 받던 그의 이론은 시간이 흘러 현대 과학 전반에서 매우 중요한 반석이 되었다. 결국 시간이 문제일 뿐이지 언제나 더 옳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그리고 과학은 그 방향을 향해 다음 단계를 밟아나갈 것이다.

참고자료

  1. 지웅배. 2025. 갈 수 없지만 알 수 있는. 더숲
  2. 존 그리빈(오수원 역). 2017. 세상을 바꾼 위대한 과학실험 100. 예문아카이브
  3. 이지유. 2024. 집요한 과학자들의 우주 언박싱. 휴머니스트
  4. David D. Nolte. 2020. The fall and rise of the Doppler effect. PHYSICS TODAY
  5. David D. Nolte. 2020. A Commotion in the Stars: The History of the Doppler Effect. GALILEO UNBOUND
  6. 크리스티안 도플러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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