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과학사: 우주의 크기를 둘러싼 세기의 대결. 그 승자는 누구?

 1920년 4월 26일. 미국 워싱턴 D.C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에서 정기 학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학회에서 연구자가 자신의 연구를 발표하는 것은 너무나 일상적인 장면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날. 두 과학자가 진행한 발표는 좀 특별했다. 서로 다른 주장을 이어간 두 과학자의 발표는 애초에 기획된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발표는 훗날 ‘대논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과학사에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장면으로 손꼽힌다.

 우주가 어떤 모습인가. 이 질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었다. 지구가 중심이고 하늘의 뚜껑에 별이 붙어 있다고 생각한 고대인의 우주론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를 거치면서 한번 무너져 내렸다. 관측 기술의 발달은 우주의 구조뿐 아니라 우주의 크기에 대한 인식마저 파괴하고 있었다. 영국의 존 허셜은 은하수의 구조를 그려보려 했으며 독일의 프리드리히 베셀은 별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우주를 그려야 했다.

야코부스 캅테인의 초상화.


 우주의 모습을 그리려 한 시도 중에 상당히 유의미한 결과를 얻은 사람은 네덜란드의 천문학자 야코부스 캅테인이었다. 캅테인이 우주의 구조를 그리기 위해 쓴 방식은 이전 허셜이 쓴 방식과 큰 차이는 없었다. 똑같이 보이는 별의 개수를 파악하는 것이 주 방식이었다. 다만 장비의 성능이 달랐고 결정적으로 ‘사진’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추가되었다. 그는 사진 속에 있는 별의 개수를 세고 고유운동과 밝기를 측정했다. 이를 통해 대략적인 은하의 크기를 추정해냈다. 지름 약 4만 광년, 두께 약 6500광년, 태양은 중심에서 약 2000에서 3000광년 떨어진 위치라는 결과가 나왔다.

 물론 이런 결과를 얻기까지 어려운 점도 있었다. 그가 주로 지냈던 흐로닝언 대학교는 천문학과 조차 없던 곳이었다. 그야말로 황무지에서 학과를 만들고 천문대를 지었지만 관측적으로 뛰어난 자료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국제적인 협력을 주장해 전 세계 천문대들의 합동 관측을 꿈꿨다. (문제는 그의 꿈이 1차 대전으로 인해 어그러지는 바람에 연구가 상당히 길어지고 말았다.) 거기에 자신의 연구 결과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다. 별빛이 먼지나 다른 요인에 의해 가려 어두워져 보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두운 별은 멀리 있다는 생각으로 계산했는데 이런 장애물이 있다면 실제 우주의 크기는 훨씬 커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추가적인 관측을 진행했다. 만약 먼지가 있다면 특정 지역에서 별의 개수가 갑자기 줄어야 할 텐데 그런 부분을 찾아내려 한 것이다. 추가적인 관측으로 이러한 문제점을 찾지 못한 그는 자신의 우주 모형에 자신감을 가졌다. 그리고 학계 역시 현재 관측 자료와 상당히 부합하는 캅테인의 우주 모형에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캅테인의 논문에 등장한 우주 구조. 은하 중심에서 오른쪽 위에 있는 작은 원이 태양의 위치이다.


 태양이 거의 중심에 위치하고 납작한 원반처럼 보이는 우주. 망원경으로 보이는 것은 이 모형을 진실이라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캅테인은 해당 분야의 권위자가 되어 있었고 통계적으로 접근한 이 모형은 상당히 그럴듯해 보였다. 그러나 항상 그래왔듯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이론은 없다. 이번에 반기를 든 사람은 윌슨산 천문대의 젊은 연구원이었던 할로 섀플리였다. 사실 섀플리가 연구하던 주제는 우주의 구조가 아니라 구상성단이었다. 섀플리의 연구 주제는 구상성단까지의 거리 측정이었다. 당시 최신 거리 측정 방법인 변광성의 주기-광도 관계를 사용하여 약 90개의 구상성단 거리를 확인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뭔가 이상했다. 구상성단의 거리 분포가 태양에서 봤을 때 굉장히 비대칭적이었다. 그 분포를 자세히 살펴본 결과 섀플리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구상성단들이 마치 무언가를 중심으로 퍼져있는 것처럼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섀플리는 그 중심이 이 우주. 즉 은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먼 구상성단의 거리를 활용하여 은하의 크기를 측정했다. 그 크기는 무려 30만 광년에 가까웠다. 캅테인의 우주 구조와 완전히 반대되는 결론이었다.

할로 섀플리의 사진.


 섀플리가 아무리 캅테인에 비해 후배 천문학자라지만 그의 연구는 학계에 상당한 관심거리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의 이론이 바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알음알음 학계의 정론이 되어가고 있던 캅테인의 우주 구조를 정면 반박하는 섀플리의 이론은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일단 그가 사용한 변광성을 이용한 거리 측정 방식의 신뢰도가 문제였다. 아직 변광성의 주기 광도 관계가 명확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시기였으며 오차 크기도 불확실했다. 이는 관측 천문학자들에게 믿어도 되는 자료인지 의심을 남기는 일이었다. 기존 관측 자료에 상당히 잘 부합하던 이론을 깨고 다른 말을 하기에는 학계의 견고한 벽을 넘을 추가적인 사다리가 필요했다.

섀플리의 논문 속 구상성단 분포. 한쪽으로 몰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섀플리가 자신의 은하 구조를 구축하고 있을 때,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릭 천문대의 천문학자 히버 커티스는 다른 연구를 하고 있었다. 당시 천체의 거리 말고도 천문학계에서 미스터리로 뽑히는 것이 또 있었다. 바로 ‘나선 성운’이었다. 관측 장비가 발달하기 전에는 뿌연 성운이라 생각했던 것들에서 점점 희미한 나선 형태가 발견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사진 관측 장비를 가지고 있던 릭 천문대에서는 이 ‘나선 성운’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뭔가 또 특이한 것이 발견되었다. 갑자기 밝아지는 별. ‘신성’이었다.

히버 커티스의 사진


 1917년, 윌슨산 천문대의 조지 리치가 NGC6946에서 신성을 하나 발견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다른 천문학자들 역시 나선 성운 속 신성 찾기 미션에 빠져들었다. 그 선봉장에 있던 사람이 바로 히버 커티스였다. 그는 나선 성운에서 발견한 여러 신성과 나선 성운이 아닌 곳에서 발견한 신성의 밝기를 비교했다. 그 차이가 거의 10등급에 달했다. 이 정도 밝기 차이라면 나선 성운들이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해석이 가능했다. 신성으로 예측한 거리, 생각보다 빠른 움직임, 은하 띠를 피해서 분포하고 있는 이상한 모습 등등. 커티스는 이런 여러 사실을 토대로 결론을 내렸다. 나선 성운은 우리 우주. 우리 은하 안에 있는 천체가 아니었다.

1845년에 영국의 로스 백작이 스케치한 M51. 나선 형태로 된 성운을 최초로 확인한 자료이다.


 우주의 구조에 대해 연구하던 섀플리 역시 나선 성운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얼핏 보면 우주의 구조라는 그의 연구와 나선 성운이 큰 연관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선 성운이 다른 은하라는 주장을 살펴보면 우리은하의 크기를 캅테인의 것과 비슷하게 놓고 있었다. 섀플리의 연구 결과가 너무 과장되었다고 본 것이다. 일단 섀플리의 은하 크기대로 다른 나선 성운들도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다면 우주의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커져야 했다. 아무리 급진적인 이론을 제시한 섀플리라고 해도 이 정도로 거대한 우주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다행스럽게도 섀플리에게는 커티스의 이론을 공격할 나름의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NGC6946의 사진. 세페우스와 백조자리 사이에 있으며 불꽃놀이 은하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사진: 유럽북방천문대 아이작 뉴턴 망원경)


 첫 번째 무기는 1885년에 발견된 안드로메다 성운 속 신성이었다. 조지 리치의 관측 이후 확인된 나선 성운 속 신성과 달리 안드로메다에서 발견된 신성은 그 밝기가 상상을 초월했다. 안드로메다 성운 전체 밝기의 10분의 1에 해당했던 이 어마어마한 신성이 만약 다른 은하에서 벌어진 것이라면 수백만 개 별이 가진 밝기와 같아야 했다. 당시의 상식으로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 쉬웠다. 또 다른 강력한 무기는 1916년, 윌슨산 천문대의 동료였던 아드리안 반 마넨이 측정한 나선 성운 속 별의 회전 속도였다. 반 마넨은 나선 성운의 나선팔 회전 속도를 측정했다고 발표했다. 주기가 무려 10만 년이라는 계산이 나온 이 관측 결과는 섀플리에게 매우 유리한 요소였다. 만약 커티스같이 나선 성운을 멀리 있는 은하로 볼 경우 당연하게도 크기가 매우 큰 천체여야 한다. 그런데 이 거대한 천체가 10만 년 주기로 회전을 한다면 그 속도가 빛의 속도에 육박하는 계산까지 나온다. 이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이 연구 결과는 섀플리에게 그야말로 자신의 이론을 지탱할 튼튼한 받침대였다.

반 마넨이 M33에서 발견한 회전을 표시한 사진.


 우주가 어떤 형태인지, 나선 성운의 정체가 무엇인지. 여러 문제가 서로 얽혀 있는 상태였다. 어느 하나가 확정이 된다면 다른 하나도 자연스럽게 풀어질 수 있는 매듭 같았다. 그런 만큼 쉽게 해결하기 어려웠다. 섀플리와 커티스 모두 각자의 구역에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20년 학회가 개최를 앞두고 있었다. 학회의 연사를 초청할 때 윌슨산 천문대장이자 미국 천문학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조지 엘러리 헤일은 자신의 힘으로 특정 주제를 선정하였다. 바로 우주의 크기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이 주제로 대결할 두 사람 역시 어렵지 않게 선정할 수 있었다. 바로 섀플리와 커티스였다. 초청을 수락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강연장으로 향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워싱턴 D.C로 향하는 기차 안. 공교롭게도 섀플리와 커티스는 같은 기차에 탔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서로 반대되는 발표를 진행할 걸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기차에서는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긴 여정을 보낸 두 사람은 강연장으로 향했다. 4월 26일 오후 8시 15분. 섀플리가 포문을 열었다. 이번 토론을 기회로 생각한 그는 상당히 긴장한 상태였다. 그는 토론의 제목인 ‘우주의 크기(the scale of the universe)’에 맞춰 자신이 만든 은하의 구조에 대해 훨씬 더 집중했다. 나선 성운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 비중이 크지 않았다. 반면에 커티스는 조금 달랐다. 아무래도 주 연구 주제가 나선 성운이다 보니 이 부분에 훨씬 비중이 컸다.

 커티스는 섀플리가 가진 두 가지 무기를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공략했다.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발견된 의문의 신성의 경우 다른 신성과 너무나 다른 형태를 보여주는 터라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라고 판단했다. 이런 특이 상황을 일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 것이다. 반 마넨의 회전 역시 1920년에는 후속 연구를 통해 이상한 점이 발견된 상태였다. 다른 학자들의 후속 연구에서는 그 회전이 도저히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뛰어난 관측 천문학자였던 반 마넨이지만 이 경우 결과에 대한 의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토론이라기보다 각자 자신의 연구를 발표한 발표회에 가까웠던 대결은 막을 내렸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한쪽이 명확한 승자라고 평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섀플리의 연구와 커티스의 연구 모두 그럴듯한 결과물을 들이밀고 있었고 쉽게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1년 후 각자의 연구 내용을 논문으로 발표한 후에도 갑론을박은 계속되었다. 결론이 나려면 방법은 간단했다. 저 먼 나선 성운까지의 거리를 확인하면 된다. 결국 이 문제는 섀플리도 커티스도 아니고 섀플리와 같이 근무했었던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에 의해 해결되었다.

 허블이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변광성을 발견하고 그 변광성을 통해 거리를 측정한 결과 무려 90만 광년이 나왔다. 이 거리는 섀플리가 생각한 우주보다 훨씬 거대했으며 커티스가 예상한 거리보다도 더 멀었다. 결국 나선 성운은 또 다른 은하였으며 우리 우주의 크기는 우리은하 바깥까지 확장되었다. 섀플리가 믿었던 반 마넨의 관측 자료는 잘못된 관측 결과였으며 안드로메다에서 발견된 어마어마하게 밝은 신성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신성과 다른 ‘초신성’이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지게 되었다. 커티스 역시 우리은하의 크기를 과소평가했다. 캅테인의 우주 구조에 좀 더 집중한 그는 외부 은하가 있다는 사실은 알아봤지만 우리 은하의 모습에서는 오류가 있었다.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찍은 창조의 기둥 중 일부. 섀플리와 커티스가 잘못된 은하 크기를 생각한 이유는 이 사진에서 보이는 성간 먼지 등으로 인한 빛의 소광 효과를 너무 과소평가한 탓이었다. 이 문제 때문에 거리 측정에 큰 오차가 생기고 말았다. (사진: NASA)


 두 사람의 발표는 우주의 구조를 알아내려는 당대 천문학자들의 노력과 생각이 담긴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비록 뚜렷한 승자 없이 둘 다 개별적으로 오류를 드러냈지만 결과적으로는 우주의 크기가 엄청나게 확장되는 계기를 마련한 일이었다. 그저 우리은하라는 것의 모습으로 우주를 표현하려 했던 이전 시대를 넘어 더 먼 곳, 더 광대한 우주라는 키워드를 얻은 것이다. 대논쟁 이후에도 섀플리는 연구 실적을 인정받아 하버드 천문대장으로 임명되어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으며 커티스는 앨러게니 천문대장으로 재직하며 관측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비록 대논쟁 이후 더 큰 스포트라이트는 에드윈 허블에게 비쳤다고는 하나 ‘대논쟁(The Great Debate)’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중요했던 1920년 4월의 이야기는 우주를 바라보는 인류의 역사에 오래도록 남게 될 것이다.


참고자료

  1. 리처드 베렌젠 외 (이명균 역). 2000. 은하의 발견. 전파과학사
  2. 사이먼 싱 (곽영직 역). 2006. 사이먼 싱의 빅뱅. 영림카디널
  3. 닐 디그래스 타이슨 외 (이강환 역). 2019. 웰컴 투 더 유니버스. 바다출판사
  4. 고버트 실링. 2021. The Great Debate of 1920: how it changed astronomy. BBC sky at night magazine
  5. 이광식. 2018. [이광식의 천문학+] 우리은하 형태, 대체 어떻게 알아냈을까? – 400년의 기록. NOW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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