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과학사: 지구를 저울에 올린 사나이

 우주 관련된 기사를 보다 보면 종종 나오는 표현이 있다. 태양 질량의 몇 배, 지구 질량의 몇 배 등등. 우주를 표현하는 단위로 태양이나 지구가 많이 사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사이즈가 작은 행성 종류에서는 지구가 익숙하고 별처럼 더 큰 사이즈에서는 태양이 가장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지구와 태양을 기준으로 삼은 우주를 인식하고 배운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그 출발점에서 의문이 생긴다. 그럼, 그 기준으로 쓰는 태양과 지구의 질량은 어떻게 알아낸 것일까.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체중계에 몸을 올리는 것처럼 지구를 저울에 올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지구를 저울에 올린 사람이 존재한다. 그것도 아주 작은 도구를 이용했을 뿐이다. 과연 어떤 방법을 사용한 것일까.

지구를 들어 올리고 있는 아틀라스 조각상.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된 작품이다. 안타깝게도 아틀라스처럼 지구를 들어 올려 무게를 측정할 거대한 사람이 없다.


 18세기 유럽은 크고 작은 전쟁 속에서 혼란을 겪던 시기였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벌어지고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났으며 미국에서는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세계 역사가 급변하고 있던 시기에 과학계 역시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었다. 뉴턴이 자신의 역학을 완성하면서 그야말로 대과학의 시대가 열렸다. 화학에서는 플로지스톤 가설을 둘러싼 논쟁과 산소의 발견 등의 사건이 이어졌고 전기를 연구하는 학문이 태동했다. 천문학에서는 허셜이 망원경으로 천왕성을 발견하면서 아직 우주에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처럼 변화무쌍한 시기에 그 누구보다 특이한 학자가 있었다. 영국의 귀족 집안 출신이자 존경받는 실험가였던 헨리 캐번디시가 그 주인공이었다.

헨리 캐번디시의 초상화와 서명.


 캐번디시는 출생 배경부터가 다른 과학자들과 많이 달랐다. 그는 잉글랜드 최상류 귀족 가문인 데번셔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제2대 데번셔 공작인 윌리엄 캐번디시의 아들이었다. 물론 장자가 아니었던 관계로 귀족 작위를 물려받지는 못했지만 막대한 부를 가질 수 있었다.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헨리의 어머니 역시 제1대 켄트 공작인 헨리 그레이의 딸이었다. 금수저 수준이 아니라 다이아 수저를 물고 태어난 헨리는 과학에 관심을 가진 소년이었다. 이 성향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인 찰스 캐번디시 역시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서 정치에 참여하기보다는 과학에 관심을 보였으며 심지어 그 스스로가 과학자로서 왕립학회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헨리가 과학 연구에 일생을 바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헨리는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상속받은 돈이 너무나 많아 ‘현자 중에 최고 부자, 부자 중에 최고 현자’라는 우스갯소리를 듣던 그는 정작 금전적으로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1년에 용돈을 무려 500파운드를 받았었다. 이는 당시 일반 노동자의 연수입이 20파운드가량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이런 많은 돈을 가진 헨리지만 정작 입는 옷은 매번 똑같은 유행이 한참 지난 옷 한 벌이었으며 먹는 음식마저도 양고기 다리 요리로 통일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은행에 쌓인 재산이 너무 많아 투자를 권유하자 이런 일로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라면서 그 거금을 ‘알아서 운용하라’고 말한 일화까지 존재한다. 인간관계에서도 특이한 점이 나타나는데 사람의 눈을 보고 말을 하지 못했으며 대인기피적 성향까지 드러냈다. 여성과 접촉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는데 하녀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쪽지를 적어 의사소통을 하기도 했으며 아무도 만나지 않도록 전용 계단을 집에 설치할 정도였다.

 이런 특이한 성향을 가진 부자 과학자 헨리 캐번디시는 과연 어떤 부분에 신경을 썼을까. 지금처럼 과학의 종류가 세분화되기 이전이던 시기인 만큼 헨리가 연구한 분야는 굉장히 넓었다. 특히 뉴턴 이후 벌어진 과학 혁명의 불길이 전 유럽을 휘감으면서 분야를 막론하고 계몽주의가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전통에서 벗어나 관찰, 실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학풍은 자연 현상을 측정하려고 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정밀 측정 도구의 발전이 합쳐지면서 시너지 효과가 일어났다. 헨리가 초기에 연구한 주제는 공기의 성질이었다. 과거 공기가 하나의 덩어리이며 쪼개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관념과 달리 다른 것들이 합쳐져 있는 물질이라는 것이 알려지고 있었다. 헨리는 이런 연구를 하던 중 금속 반응을 통해 새로운 기체를 발견하였다. 후에 우리는 이 기체를 ‘수소’라 부르게 되었다. 헨리의 연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신이 발견한 기체인 수소와 또 다른 학자가 발견한 산소를 합쳐 물을 생성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는 물이라는 물질 역시 무언가의 합성이라는 것을 밝혀낸 대단한 업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사라진 기체의 양과 물의 양을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측정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완벽한 실험 구상과 측정으로 이름을 날렸다. 화학적인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그에게 새로운 연구 주제가 눈앞에 떨어졌다.

헨리 캐번디시의 수소 수집 장치.


 헨리가 한참 기체에 대한 연구를 준비하고 있던 1760년대,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에서는 지역 경계선을 그리는 분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미국 북동부의 펜실베이니아와 메릴랜드 주 사이의 경계를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영국에서는 천문학자인 찰스 메이슨과 측량기사 제레미아 딕슨을 파견했다. 이들이 측량한 결과는 현재 메이슨-딕슨 선이라 불리며 남북전쟁에서 아주 중요한 역사적 경계선으로 작용한다. 이 선은 별을 관측하여 정확한 위도를 구한 뒤, 같은 위도선을 따라 경계선을 나누는 방법으로 정해졌다. 당시 최신 측량 기술을 동원한 이 방법이 알려지자 학자들은 조금 다른 것에 관심을 보였다. 만약 측량하는 곳 주변에 거대한 산이 있다면 그 산의 중력이 측정값에 오차를 만들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오차를 확인할 수 있다면 인력을 구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지구의 밀도를 구할 수 있다! 생각은 곧바로 실제 측정으로 이어졌다.

메이슨-딕슨 라인의 모습.


 영국의 왕실학회는 지구 밀도 측정을 위한 위원회를 결성하고 왕실천문관이던 네빌 메스켈린이 실험을 총괄하도록 했다. 스코틀랜드에 위치한 쉬헬리언 산으로 향한 원정대는 산의 북쪽과 남쪽에 임시 천문대를 세웠다. 이 천문대에서 별 관측을 통해 만든 수직선과 산의 중력에 의해 끌어당겨진 추의 수직선 각도를 측정했다. 이를 통해 산이 추에 작용하는 중력을 계산할 수 있었다. 다만 아직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이 계산 결과를 통해 지구의 질량을 알아내야 밀도를 계산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구 질량을 알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측정값이 하나 더 필요했다. 산의 질량이었다. 당시 원정대는 산의 질량을 알아내기 위해 산의 모양을 측정했다. (이 과정에서 같은 높이를 연결하는 선. 등고선이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암석 샘플을 가져와 밀도를 측정하고 이를 통해 산의 질량을 가정했다. 모든 측정이 끝나고 계산한 지구의 밀도는 물의 밀도보다 4.5배 크다고 나왔다. 이 연구로 메스켈린은 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

쉬헬리언(schiehallion) 산의 모습.


 영국 과학계가 뉴턴의 중력을 완벽하게 해석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을 때, 밀도 측정 위원회에 소속되어 있던 헨리는 이 실험 자체에 오류를 파악하고 있었다. 산의 질량을 측정하는 방식이 나름대로 과학적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태생적인 한계가 뚜렷했던 것이다. 샘플 암석으로 산 전체의 밀도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며 등고선을 통해 높이를 나타내고 산의 크기를 재는 방식도 완벽할 수는 없었다. 이런 문제는 헨리뿐 아니라 같은 위원회에 소속되어 있던 영국의 과학자이자 목사이던 존 미첼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정확한 측정을 원했던 두 사람은 다른 방식의 실험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동의했다. 다만 두 사람이 하고 있던 일들이 너무 많았다. 지구의 밀도를 측정하려는 생각은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었다.

 바쁜 와중에 실험 도구를 만들기 시작한 건 존 미첼이었다. 그가 고안한 장치는 ‘비틀림 저울’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었다. 철사에 매달린 막대기 끝에 작은 공 두 개가 달려 있다. 그리고 바닥에는 커다란 공이 두 개가 따로 존재한다. 이 상태에서 철사에 달린 작은 공은 큰 공의 중력에 이끌려 조금씩 움직이게 된다. 하지만 막대기에 달려 있으니 철사가 비틀어지면서 회전 운동을 하게 된다. 이는 두 공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이 막대기가 회전하려는 힘을 만든 꼴이 된다. 두 공 사이의 중력을 측정할 수 있다면 지구가 공을 당기는 힘과 비교해 지구 질량을 계산할 수 있다! 질량을 알고 지구의 크기를 안다면 당연하게도 밀도 역시 계산할 수 있다. 미첼은 부정확한 산의 질량을 사용하기보다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공의 질량을 이용하길 원했다. 이 실험 도구를 설계하고 만들었지만 안타깝게도 미첼은 1793년 사망하고 만다.

비틀림 저울의 단면도. 도르래에 매달린 큰 공 두 개와 막대기에 연결된 작은 공 두 개가 보인다.


 미첼의 실험 도구를 이어받은 사람은 바로 헨리였다. 그 사이 전기 실험 등 다른 분야에 눈을 돌렸던 그는 다시 지구 밀도 측정에 들어갔다. 이를 위해 아직 미완성인 실험 도구의 개량에 들어갔다. 미첼의 비틀림 저울에 담긴 원리는 완벽해 보였다. 다만 측정을 위해서는 조금 더 섬세한 작업이 필요했다. 공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이 매우 작기 때문에 공기의 흐름으로도 움직임에 오차가 생길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헨리는 실험 장치를 아예 나무 상자 안에 넣어버렸다. 그리고 커다란 공을 움직일 때 장비에 진동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방 밖에서 도르래를 이용해 움직이도록 설계를 바꿨다. 이렇게 섬세한 장비이기 때문에 망원경으로 방 밖에서 관측했다. 이는 비틀리는 각도가 너무 작기 때문에 눈금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철사의 강성을 직접 재기 위해서 장비를 일부러 진동시켜 주기를 측정하기도 했다. 회전 힘을 정확히 측정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몇 년 동안 장비를 개량한 끝에 1797년 가을. 측정을 시작했다. 67살의 나이에도 전혀 줄어들지 않은 집념은 그를 장비 앞에 끊임없이 앉아 있도록 만들었다. 미세한 진동을 측정하기 위해 2시간 이상 계속 쳐다만 봐야 했던 적도 많았다. 체온으로 인한 실험 장치 주변의 온도 상승조차도 오차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람은 물론 조명조차 조심스럽게 다뤘다. 금속 공이 지구 자기장의 영향으로 약간이나마 자성을 띠게 될지 몰라 위치를 바꾸기도 하고 자석으로 실험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교체 측정을 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반복, 또 반복 실험의 연속이었다. 그 결과 1798년 6월 21일, 왕립학회에서 해당 논문이 발표되었다. 헨리의 계산 결과 지구의 밀도는 물 밀도의 5.48배로 나왔다. 이는 이전 메스켈린이 산을 통해 측정한 결과와 달랐다. 현대 기술로 측정한 지구의 밀도가 약 5.51배이니 엄청난 정확도를 보였음을 알 수 있다.

 헨리는 논문에서 단순히 실험의 방법과 측정 결과만 나열하지 않았다. 측정 과정에서 오차가 나올 수 있는 부분들을 상세하게 나열했으며 이후 추가 실험을 통해 바로잡겠다는 이야기까지 남겼다. 안타깝게도 노년에 다다른 헨리는 추가 실험 결과를 다시 보여주지는 못했다. 다만 신기하게도 그의 실험 결과는 후대에 다른 의미로 진화하였다. 지구의 밀도를 구하려던 실험이 전혀 다른 값을 계산하게 된 것이다. 그 값은 바로 중력상수였다. 뉴턴은 중력이 질량에 비례하고 거리에 반비례한다는 관계는 알아냈지만 그 비례상수 값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 비례상수, 즉 중력상수를 알 수 있다면 그 중력값을 정확히 계산하는 것이 가능했다. 추가로 중력상수 값을 통해 지구를 벗어나 먼 우주에 있는 천체의 질량 값을 정확히 측정하는 것도 가능했다. 전 우주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중력상수라는 값은 물리, 천문학에서 지구, 태양, 저 먼 별과 성단, 은하를 건너 우주 전체 질량을 계산할 수 있는 아주 강력한 무기였다.

 헨리 캐번디시는 평생을 정교한 측정과 실험의 세상에서 살아갔다. 공기의 성분 발견이나 지구 밀도 측정 말고도 전기 분야에서도 상당히 많은 연구 시간을 투자했다. 다만 특이하게도 연구 결과를 하나하나 발표하지 않았는데 그의 사후 자료를 정리하다 보니 1785년에 발견된 쿨롱의 법칙을 1770년대에 실험으로 확인하고 있었으며 전위차의 개념 역시 먼저 파악하고 있었다. 심지어 1827년에 발표된 전류와 저항의 관계인 옴의 법칙도 1770년대에 이미 연구하고 있었음이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본인 몸에 전기 충격을 줘서 세기 비교를 했다고 한다.) 이처럼 분야를 가리지 않고 세상을 숫자로 정밀하게 측정하려 했던 그의 노력은 시대를 수십 년 앞질러 나아가고 있었다.

 대학 시절. 물리학 실험 수업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실험보다도 오차의 원인을 찾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오차의 원인을 찾아내려 신경 쓰다 보면 이런 것까지 고려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하지만 헨리 캐번디시가 열어놓은 정밀 측정의 시대에서 작은 오차 하나도 쉽게 봐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꼼꼼히 찾아낸 것들이 모이고 모여 거대한 우주를 이해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을 증명하지 않았는가. 지구를 측정한 저울은 고작 폭 2m, 높이 1.3m 정도의 작은 상자였다. 그 안에서 찾아낸 업적을 생각하면 단 하나의 틈도 놓치지 않는 과학자의 눈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일지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캐번디시 연구소의 모습. 그의 사후 남겨진 막대한 재산은 친척에게 넘어갔으며 50년 뒤 그 재산을 통해 케임브리지 대학에 캐번디시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하였다. 이 연구소는 영국의 대표적인 물리학 연구소가 되었으며 원자 구조로 유명한 J,J 톰슨과 러더퍼드, 전파 천문학의 대가였던 마틴 라일과 앤서니 휴이시 등 36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참고자료

  1. 로버트 P. 크리즈 (김명남 역). 2006.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험 열 가지. 지호
  2. 존 그리빈 (권루시안 역). 2021. 과학을 만든 사람들. 진선출판사
  3. 이광식. 2019. [이광식의 천문학+] 저울 하나로 지구 무게를 단 천재의 이야기. NOW news
  4. 2008. June 1798: Cavendish weighs the world. APS
  5. 이지은. 2006. [과학史 광장]세계 최초로 수소를 발견한 ‘캐번디시’. Hello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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