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3년 6월 22일 수요일. 로마에 위치한 산타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 지혜의 여신인 미네르바의 신전이 있던 장소로 알려진 이곳은 교황의 직속 종교 재판소가 들어서 많은 이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박해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시대를 앞서간 대학자의 지혜가 굴복할 위기에 처했다. 흰옷을 입고 성당에 세워진 노인에게 판결문이 낭독되었다.
“그대는 거짓일 뿐 아니라 거룩한 성경에 어긋나는 이단적인 주장,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돌지 않고 지구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성서에 위배된다는 선언이 내려진 후에도 지지하고 옹호하였음이 의심된다. … 중략 … 우리는 그대를 검사 성성에 공식 구금하도록 선고한다.”
선고가 내려진 후 노인이 진술서를 읽어나갔다.
…전략… “저는 위에서 말한 대로 입장을 철회하고 맹세하고 약속하고 구속하겠습니다. 제 손으로 직접 이같이 서약한 본 문건에 서명하며 1633년 6월 22일 오늘, 미네르바 수도원에서 이 문서를 한 글자 한 글자 낭독하는 바입니다.”
죄를 인정한 노인은 추기경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방을 나섰다. 종교 재판 과정에서 흔히 볼 수 없던 여러 일들이 섞여 있는 이 사건은 훗날 신화가 되어 사람들에게 이어져 왔다. 그 노인의 이름은 ‘갈릴레오 갈릴레이’. 이 사건의 이름은 ‘갈릴레오 사건(Galileo affair)’이라 불리며 과학사 뿐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상당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도대체 1600년대 로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던 것일까.

갈릴레오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던 1500년대 후반은 문화적으로 유럽의 부흥기였던 르네상스이기도 했지만 종교적으로 구교와 신교의 불화가 커지고 있던 불안정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젊은 학자였던 갈릴레오는 싸움닭 기질을 가진 인물로 기존 과학 질서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피사 대학 학생이던 시절부터 다른 교수, 학생들과 의견 충돌이 자주 있었던 그는 아예 졸업장을 받지 않고 대학을 나왔다. 개별적으로 역학 연구를 이어가던 그는 천칭을 개량하는 작업을 거치면서 약간의 성과를 거뒀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모교였던 피사 대학교의 수학 교수로 부임하였다. 이제 학계의 일원으로 들어온 갈릴레오였지만 아직 큰 영향력을 가지기에 그의 실적, 명성은 부족한 상태였다. 그가 폭풍의 눈으로 들어간 것은 바로 망원경을 접하면서부터였다.

갈릴레오가 파도바 대학으로 부임하여 연구를 이어 나가던 1609년, 새롭게 등장한 망원경이라는 도구를 자기 손으로 제작하는 것에 성공한 그는 이 신비한 장치의 끝부분을 저 높은 하늘로 돌렸다. 그리고 그가 본 것들은 당시 우주관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매끄럽다 생각했던 달은 울퉁불퉁한 구덩이로 가득 차 있었고 목성 주변에는 목성을 도는 위성이 발견되었다. 우주의 모든 것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설명하던 천동설의 설명과는 사뭇 다른 현상이었다. 이 관측 결과를 엮어 발간한 책 ‘시데리우스 눈치우스’는 갈릴레오의 지위를 올려주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탈리아의 유력 가문이었던 메디치 가문에 연줄을 만든 갈릴레오는 책을 토스카나 대공인 코시모 데 메디치에게 헌정하였다. 그는 파도바 대학을 떠나 토스카나 대공의 수학자 겸 철학자로 임명되었다. 대학 졸업장조차 따지 못했던 반항심 가득한 젊은 학자는 중년이 되어 학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1610년, 갈릴레오의 책이 세상에 나왔을 때, 망원경으로 인한 파장은 상당히 큰 상태였다. 지식인 중에는 망원경이 믿을만한 관측 도구인지 의심하는 눈초리도 존재했다. 베네치아의 잉글랜드 대사는 본국의 왕인 제임스 1세에게 해당 소식을 전하면서 “이것은 전하께서 어디에서 들었던 어떤 이야기보다 더 괴상한 소식입니다.”라고 적었다. 갈릴레오의 망원경 성능이 다른 것들보다 월등히 좋아 발생한 이 문제는 점차 기술이 올라가면서 줄어들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단순하게 이 발견의 진위 자체에만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피렌체의 철학자였던 루드비코 콜롬베는 갈릴레오의 발견에 극렬히 반대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그가 반대했던 방법은 단순히 ‘망원경을 믿을 수 없다’ 수준이 아니었다. 성경의 문구를 직접적으로 인용하면서 지구가 움직인다는 사실이 신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 것이다.
콜롬베의 논문은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갈릴레오가 본격적으로 논쟁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갈릴레오는 망원경으로 추가적인 발견을 진행했다. 금성의 위상이 변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이는 기존의 천동설 체계로는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었다. 그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라 생각했다. 어리석은 적들을 굴복시킬 무기를 또 하나 장착한 그는 자신의 생각을 좀 더 자세히, 그리고 확실하게 설명하기 위해 로마로 직접 떠났다.
1611년 3월. 로마에 도착한 갈릴레오는 환대 속에 여러 인물을 만나게 된다. 당시 로마는 학문적으로 융성한 도시였다. 교황의 지지를 받던 예수회(이 예수회는 지금도 존재하며 올해 선종한 프란체스코 교황이 예수회 출신 첫 교황이었다.)는 로마 기숙학교를 설립하여 여러 학문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있었으며 귀족인 페데리코 체시가 설립한 최초의 과학 아카데미인 린체이 아카데미도 존재하고 있었다. 예수회 측에서는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시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직접 망원경으로 갈릴레오의 발견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의 발견을 인정하는 유력 인사들이 늘어났다. 예수회 측에서 갈릴레오와 접촉한 인물 중에는 당시 교황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던 인물인 벨라루미누스 추기경도 있었다.

1611년 갈릴레오의 로마 여정은 그에게 큰 자산을 안겨주었다. 예수회에서 그의 발견을 인정받은 것뿐 아니라 페데리코 체시를 든든한 후원자로 두었으며 여러 추기경과 친분을 쌓았다. 이 중에는 훗날 교황이 되는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갈릴레오와의 편지에 ‘친애하는 그대의 형제’라는 말을 쓸 정도로 호의를 보였다. 또한 교황인 바오로 5세를 직접 만나는 경사를 누리기도 했다. 이렇게 갈릴레오가 큰 성공을 수확하고 있을 때, 그 그림자 속에서 갈릴레오에 반하는 움직임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벨라루미누스 추기경은 교회를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하던 인물이었다. 찬사를 받는 갈릴레오에게 호의적인 언사를 남기기도 하면서 새로운 발견을 축하했지만 그는 그 발견이 다른 차원으로 번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다른 예수회 학자들에게 해당 발견에 대해 물어보면서 의견을 구하기도 하였다. 벨라루미누스는 1600년, 조르다노 브루노에게 이단으로 화형을 선고한 장본인이었다. 갈릴레오의 발견이 또 다른 브루노를 만들지 파악해야 했다. 갈릴레오가 한참 환영에 취해있을 1611년 5월, 그는 파도바 대학에서 갈릴레오의 동료 교수였던 자의 종교재판소 회의에 참석했다. 그 회의에서는 해당 교수에 대한 조사뿐 아니라 갈릴레오와의 연관성을 조사하라는 말이 나왔다. 해당 조사가 깊게 진행되었다는 흔적은 없다. 하지만 교황청 내에서 새로운 사상이 경계의 대상이었다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꾸준히 이어진 다른 학자들의 공격을 받아치던 갈릴레오에게 첫 번째 시련이 닥쳤다. 이 시련은 제자의 편지에서 시작되었다. 갈릴레오의 제자였던 베네데토 카스텔리는 갈릴레이가 있었던 피사 대학교의 수학 교수에 재직 중이었다.(그가 이 자리를 차지하는데 갈릴레오가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토스카나 대공이 대학교수들을 모아 연 연회 자리에서 갈릴레오의 발견에 관해 토론을 하게 되었다. 그 토론에 관심을 보인 사람은 대공의 어머니인 크리스티나 부인이었다. 독실한 신자였던 그녀는 성서의 내용과 대치되는 지구의 움직임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카스텔리는 자신이 잘 설명했다는 듯 갈릴레오에게 편지를 썼지만 그는 안심하지 못했다. 곧장 제자에게 보내는 편지(후에 이 편지는 대공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이름으로 조금 수정을 가하게 된다.)를 작성한 그는 이 글 안에서 성서는 실수하지 않지만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은 실수할 수 있다는 방식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이는 그가 언급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문장이었다. 신학자들에게 주어진 권한인 성경 해석에 관한 이야기를 일개 신자인 갈릴레오가 꺼낸 것이다.

계산적 연구의 일부로만 남아있던 지동설이 갈릴레오에 의해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도미니코 수도회의 일원이었던 니콜로 로리니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성서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판하였으며 같은 도미니코회의 신부인 토마소 카치니는 설교 중 노골적으로 갈릴레오와 그의 지지자들을 비판했다. 그는 설교 중 사도행전의 한 구절을 읊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행전 1장 11절)
이 구절은 하늘만 쳐다보지 말고 현세의 일을 잊지 말라는 의미를 담은 구절이었다. 하지만 단어의 유사성을 이용하여 갈릴레오와 지지자들을 공격하는 용도로 사용한 것이다. 두 사람은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로리니는 갈릴레오가 제자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을 입수하여 이 안에 있는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고발했다. 갈릴레오 시대 이전에 있었던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자신의 개념에 따라 성경을 왜곡하거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하면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어떤 것이 이단인지 개념을 정립한 이 공의회에 따르면 갈릴레오의 편지는 위험할 수 있었다.

고발장을 입수한 교황청 검사성성은 해당 문서가 변질되었을 수 있다 생각하여 원본을 요청했다. 이때 갈릴레오는 본인이 직접 문서를 재수정하여 표현을 완곡하게 고치기도 했다. 이 원본으로 본인의 무고함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로리니의 고발 자체는 빈약한 근거 혹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식으로 마무리되었지만 문제는 하나 남아있었다. 태양의 움직임, 지구의 움직임을 성서에 빗대어 볼 때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검사성성에는 특별 위원회가 꾸려졌고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태양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생각은 성서에 반하는 이단이다. 그러나 지구가 움직인다는 생각은 이단까지는 아니다.
위원회는 천동설과 지동설 중 하나를 고르는 곳이 아니었다. 각 내용이 성서에 반하는지 아닌지만 판단한 것이다. 성서에 여럿 등장하는 태양이 움직이는 듯한 언급에 맞춰 태양의 부동성은 이단이 되었다. 이 결과에 따라 검사성성에 속해 있던 벨라루미누스는 갈릴레오에게 경고를 해야 했다. 1616년, 교황인 바오로 5세는 벨라루미누스에게 갈릴레오를 소환하여 태양이 세상의 중심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가 일주운동을 한다는 생각을 가르치지도 논하지도 옹호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도록 했다. 이 경고를 갈릴레오는 당연하게도 받아들였다. 교회와 정면 대결을 하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선택일 뿐이었다.
1616년 2월 26일 벨라루미누스의 자택에서 갈릴레오에게 전해진 이 경고는 문서로 남았다. 이상하게도 갈릴레오의 서명도 벨라루미누스의 서명도 없는 이 문서는 교황청에 남아 잠들었다. 갈릴레오는 이후 바로 로마를 떠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안전장치가 필요했던 그는 벨라루미누스 추기경에게 자신이 이단이 아니라는 증명서를 발급해달라고 요청했다. 추기경은 이 요청을 들어줬다. 이 사이에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금서로 지정되었다. 떠오르던 지동설에 족쇄가 채워졌다. 갈릴레오 역시 추기경의 증명서라는 안전장치를 얻었지만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사실상 갈릴레오 없이 진행된 그의 첫 종교재판은 겉으로 보기엔 생각보다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었다. 갈릴레오는 더 깊은 재판의 늪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이제 막 서게 된 것이었다.
———————————————————–2편에 이어서
참고자료
- 마이클 화이트(김명남 역). 2009. 갈릴레오. 사이언스북스
- 윌리엄 쉬어, 마리아노 아르티가스(고중숙 역). 2006. 갈릴레오의 진실. 동아시아
- 다나카 이치로(서수지 역). 2018. 400년 전. 그 법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사람과 나무사이
- 데이바 소벨(홍현숙 역). 2012. 갈릴레오의 딸. 웅진지식하우스
- 최원석. 2019. 갈릴레이 종교재판의 진실. 한겨례
- 허정원. (2018). 종교재판 두려웠나…갈릴레오 자필편지엔 줄 긋고 고친 흔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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