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과학사: 갈릴레오, 재판장에 서다. (2)

 로마에서 돌아온 갈릴레오는 이전과 다르게 조용하게 일상을 보냈다. 그의 연구 역시 일반적인 우주의 구조를 생각하는 것에서 좀 더 실용적인 것이 중심이 되었다. 그는 이전에 이미 한번 제안했었던 목성 위성 주기를 이용한 경도 측정법을 다시 제안하는 등 항해 기기 고안 및 실험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몸도 조금씩 안 좋아지고 있던 갈릴레오를 다시 천문학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이는 사건이 1618년에 벌어졌다. 혜성이 찾아온 것이다.

1618년 11월에 나타난 혜성을 그린 그림.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


 1618년 가을에 혜성이 연달아 3개가 찾아왔다. 안타깝게도 갈릴레오는 이 혜성을 직접 보지 못했다. 그전부터 이어진 지병이 악화된 탓에 관측할 엄두도 내지 못한 것이다. 관측은 하지 못했지만 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혜성에 대한 그의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로마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예수회 소속 수학 교수인 오라치오 그라시는 혜성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익명으로 발표하였다. 그는 혜성을 관찰한 결과 시차가 발견되지 않으므로 달 너머 먼 곳에 있다는 의견을 보였다. 갈릴레오는 이 생각에 반대했다. 그것도 매우 격렬하게.

 갈릴레오가 공격한 것은 티코의 우주관이었다. 뛰어난 관찰자였던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는 지구를 중심에 두고 태양이 회전하며 그 태양 주변으로 행성이 도는 체계를 구상했다. 이는 기존의 천동설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절충하는 제안이었다. 당시 그라시를 포함한 예수회에서는 이 체계에 어느 정도 호의를 보였다. 지구를 움직이지 않고도 현재 관측 결과를 적당히 해석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갈릴레오는 티코의 의견에 반대하며 그라시의 접근법에 반기를 들었다.

티코의 우주관. 지구 중심설이지만 다른 행성들을 태양 주변을 돌도록 만들어 두 이론을 절충했다.


 그라시는 기본적으로 혜성이 달 바깥 천체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 관측적 계산보다 기존 학설에 기대어 확신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그 와중에 망원경의 원리마저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 상태였다. 갈릴레이는 혜성이 천체가 아니라 대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 과정에서 관측 결과를 기존 학설에 연관 지어 단 한가지 방법으로 설명하려는 그라시의 어조를 ‘권위에 기대어 표현했다,’라고 말하며 강하게 비난했다.

 두 사람이 가명으로 (갈릴레이는 제자의 이름으로 자신의 논리를 발표하기도 했다.) 서로에게 공격을 하고 있었다. 물론 서로 누가 자기를 공격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갈릴레이는 본인의 이름으로 시금사 “Il Saggiatore” (The Assayer) 라는 이름의 책을 발표한다. 이 책에서 그는 지동설과 관련된 내용은 담지 않았지만 과학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보인다.

갈릴레오의 시금사 표지.


“과학은 눈앞에 끊임없이 펼쳐지는 거대한 우주 속에 적혀 있다. 그러나 먼저 그 책에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하고 문자를 해독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는 한 이해할 수 없다.”

 갈릴레오는 우주를 책에 비유하며 자연 연구를 통해 신의 위대함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침 이 책이 나올 즈음 그에게 희소식이 전해진다. 갈릴레오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던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어 우르바노 8세가 된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갈릴레오의 지인들이 교황청 요직에 포진되었다. 운신의 폭이 전보다 넓어졌다고 느낀 갈릴레이는 좀 더 적극적으로 지동설을 주장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초상화


 사실 갈릴레오가 다음 계획을 준비하고 있을 때 그 뒷면에서는 또 다른 위협이 있었다. 교황 우르바노 8세의 극찬을 받은 시금사가 검사 성성에 고발된 것이었다. 고발의 이유는 매우 위험했다. 시금사에서 갈릴레오가 주장한 내용이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논의된 성체성사의 실체 변화 교리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실체 변화는 성체성사 때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빵과 포도주가 물리적 형태는 남아 있지만 본질이 변한다는 믿음을 말하는데 갈릴레오가 시금사에서 주장하는 내용 하나가 이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한 내용은 바로 원자론이었다. 그는 대상을 구별하는 색, 소리, 맛 등 여러 부분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감각기관에 존재하며 대상 자체에는 아주 작은 입자가 운동하고 있다는 주장을 했다. 이 말대로면 빵과 포도주가 겉모습을 유지한 채로 본질이 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의 우리는 원자라는 개념에 익숙한 편이지만 당시 교리에 걸고넘어지면 충분히 문제가 될만한 내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고발을 담당한 추기경이 교황의 조카이자 갈릴레오의 우군이던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추기경이었던 관계로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교황청에 또다시 기록이 남았다. 갈릴레오에게 적대적인 학자, 종교인의 세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었다.

2020년. 코로나 시국에 성탄 전야 미사에서 성체성사를 하고 있는 프란체스코 교황.


 이런 상황 속에서 갈릴레오는 나빠지는 몸을 이끌고 평생의 역작을 완성하려 했다. 오래전부터 지동설의 증거라 굳게 믿었던 조석 현상을(그는 바닷물의 움직임이 지구 움직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정리하여 지동설을 주장하고 싶었다. 새 교황과의 면담을 통해 지동설을 계산의 편의를 위한 하나의 가설로 주장하는 것은 당연히 가능하다는 말을 들은 그는 1629년 책을 완성하고 검열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출판되는 책은 교황청의 검열을 거쳐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당시 교황청의 검열관은 갈릴레오에게 우호적이던 니콜로 리카르디 신부였다.(시금사 역시 그가 검열했고 정상적으로 출판되었다.) 그렇게 검열만 마치면 순조롭게 진행될 줄 알았던 새 책은 금세 난관에 빠졌다. 먼저 국제 정세가 혼란에 빠져 있었다. 구교와 신교 사이의 30년 전쟁은 끝날 줄 모르고 점점 번져갔다.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분쟁에서 프랑스 편을 강하게 들었던 교황은 편집증적인 증세를 보이며 불안정한 상태를 이어갔다. 로마 내에서 교황을 향한 안 좋은 예언이 떠도는 등 추기경 시절 갈릴레오가 보았던 사람은 이제 없었다. 거기에 갈릴레오의 최고 후원자였던 페레디코 체시가 흑사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책을 출판해 줄 새 후원자도 필요했다. 전쟁과 함께 돌고 있는 흑사병 역시 방해가 되었다. 여러모로 그의 새 책 출간은 늦어지고 있었다.

 흑사병 때문에 직접 검열을 받으러 가기 어려워진 상태에서 요직에 앉아있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리카르디 신부를 설득한 갈릴레오는 검열을 피렌체에서 받고 출판을 허가받았다. 교황청이 아닌 피렌체는 갈릴레오의 홈그라운드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1632년 2월,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라는 이름으로 책이 세상에 나왔다. 이탈리아 지역에만 그치지 않고 유럽 전역에서 책이 화제가 되었다. 지동설을 논리적으로 널리 알리려는 갈릴레오의 노력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밝아진 빛만큼 그에게 그림자가 드리우기까지 몇 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1632년 7월 25일, 로마의 검열관 리카르디 신부가 피렌체로 편지를 보냈다.

“갈릴레오의 책을 받아보았습니다만, 교회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그 부분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정하고 그동안 책의 배포를 보류하길 원하십니다.”

‘대화’의 표지. 이 표지에 있는 세 마리 돌고래가 친인척을 요직에 앉힌 교황을 조롱하기 위함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자기들끼리 모여 있는 모습을 악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물론 이는 그냥 출판사의 마크였다.


 책을 확인한 검열관과 교황은 책에 문제가 있음을 인지했다. 세 사람의 대화 형태로 쓰인 책은 등장인물의 이름에서부터 편파적인 책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천동설을 옹호하는 등장인물 심플리치오는 그야말로 책 내내 지동설을 주장하는 살비아티와 중재자로 나오는(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지동설에 조금 더 가까운) 사그레도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 심플리치오의 입을 빌려 교황의 의견을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설로서만 지동설을 다루라는 말까지 그야말로 무시해버린 이 책은 교황을 분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결국 같은 해 9월, 이 책을 심의하는 특별 위원회가 열렸다. 그리고 이 위원회가 조사 활동을 하던 도중 중요한 문서가 재발견되었다. 바로 1616년 갈릴레오가 벨라루미누스 추기경에게 받은 경고 서류가 나타난 것이었다. 해당 당사자들이었던 벨라루미누스 추기경과 바오로 5세는 죽은 뒤였다. 갈릴레오는 자신이 과거 지동설 주장과 관련하여 경고를 받았음을 검열관에게 알리지 않았다. 이는 그에게 크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도화선이었다.

 1632년 10월,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갈릴레오의 소환이 확정되었다. 건강을 이유로 차일피일 소환을 미루던 갈릴레오도 교황청의 지속적인 소환 명령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를 넘겨 1633년 4월 12일. 첫 재판이 열렸다. 갈릴레오의 지인들은 그가 검사 성성에 복종하고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재판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1616년 벨라루미누스 추기경의 경고가 문서화 되어 있었고 그 문서에는 ‘어떠한 형태로도’ 가르치거나 옹호하지 말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문서에 대항하여 갈릴레오는 추기경이 만들어준 증명서로 자신을 방어하려 했다. 검열관에게 이 경고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도 책이 지동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빠져나가려 했다.

크리스티아노 반티. 로마 종교재판 이전의 갈릴레오. 1857년.
그림처럼 갈릴레오가 당당하게 재판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종교재판은 실질적으로 무죄, 유죄를 따지는 곳이 아니었다. 이단 혐의를 받는 사람의 사상과 의도를 검증하는 곳이었으며 피고는 죄를 고백하고 교회는 그 죄로부터 피고의 영혼을 구제하는 곳일 뿐이었다. 그야말로 속죄의 기회를 주는 곳으로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갈릴레오의 변호는 일을 어렵게 만들기만 할 뿐이었다. 당시 재판을 담당하던 검사 성성 총 주임인 빈첸조 마쿨라노는 두 번째 재판이 열리기 전 갈릴레오를 따로 만나 죄를 인정하도록 설득했다. 갈릴레오는 이 의견을 받아들였지만 4월 30일 열린 두 번째 재판에서 책을 살리기 위해 한 가지 제안을 추가했다. 검사 성성의 의견을 책에 넣기 위해 책의 뒷부분을 추가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 재판에서 그는 자신이 헛된 야심과 무지와 부주의 때문에 실수를 했다는 식으로 주장을 했다. 이런 변호에도 불구하고 책의 뒷부분을 추가하겠다는 의견은 묵살되었으며 5월 20일에 이어진 세 번째 재판에서는 자신은 고의로 지동설을 옹호하는 듯한 책을 쓴 것이 아니라는 항변서를 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제 판결만이 남았다.

갈릴레오가 말년을 보낸 피렌체의 아르체트리. 1642년 1월 8일 갈릴레이가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5월 안에 마무리될 줄 알았던 판결은 달을 넘겨 6월 중순이 되어서야 진행되었다. 6월 16일, 검사 성성 집회에서 만장일치로 갈릴레오의 투옥과 ‘대화’의 금서가 결정되었다. 이후 6월 22일, 갈릴레오가 직접 이단 포기 선서를 하면서 그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판결 이후 곧바로 투옥이 가택연금으로 변경되기는 했으나 이 재판의 결과는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이는 이전 종교재판에서는 보기 힘든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단순하게 이단 심문관뿐 아니라 수학, 철학 교수들에게도 전달된 이 재판 내용은 본보기의 역할을 하였다. 투옥에서 가택연금으로, 가택연금에서도 기존 면회, 대화도 금지였던 내용이 전부 완화되었고 허가를 받으면 외출도 할 수 있는 상태로 처벌이 경감되었지만 노년의 갈릴레이에게 남은 시간은 많이 없었다. 판결을 받고 10년이 지나지 않은 1642년. 대과학자는 세상을 떠났다.

갈릴레오가 가택 연금 중 집필한 ‘새로운 두 과학’ 표지. 천문학적 내용은 들어가지 않았지만 역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존 이론을 깨는 최초의 근대 과학 교과서라 불리는 중요한 서적이었다.


 갈릴레오의 사건은 오랫동안 과학과 신학이 정면충돌한 사건, 과학에 대한 종교의 무지가 만든 사건 등의 이름으로 쓰여왔다. 물론 갈릴레오가 기존 패러다임에 반대하면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종교계가 지동설에 일방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브루노를 불태웠던 벨라루미누스 추기경은 지동설의 증거가 존재한다면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인데 아직 아무도 그것을 제대로 증명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교회 입장에서 지동설을 주장할 결정적 증거가 아직 부족했던 것이다. 실제로 지구가 공전한다는 증거가 될 것은 별의 위치가 달라 보이는 연주시차가 있었다. 하나 당시의 관측 기술로 연주시차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구 공전의 증거인 연주시차. 태양을 중심에 두고 지구가 정 반대편에 있을 때 별이 보이는 위치가 달라져야 한다.


 또한 갈릴레오 자신도 케플러가 이미 주장했던 행성의 타원 궤도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조석 현상을 공전의 증거라는 잘못된 생각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본인이 다른 방법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일에 확언하면 안 된다고 그라시를 비난했던 것을 생각하면 신기한 일이라 볼 수 있다.) 지금의 우리가 보는 것과 달리 갈릴레오는 아직 완벽하지 않은 무기를 들고 링에 올랐다. 그가 기존 학설을 뒤집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갈릴레오의 재판은 그 이유가 어찌 되었건 이탈리아에서 연구 활동을 위축시키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복잡한 정치적 이유와 얽혀 과학의 중심지가 점차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갈릴레오의 바통을 이어받아 과학 혁명의 불꽃을 활짝 피운 사람이 영국 출신의 아이작 뉴턴임을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교황청이 ‘대화’를 금서로 올리자 오히려 이탈리아 외부에서는 책에 대한 관심도가 올라가 웃돈을 주고 사는 일까지 벌어졌다. 갈릴레오의 생각이 더 강하게 퍼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1979년 당시의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는 위원회를 구성해 갈릴레오 사건에 대해 다시 조사하도록 했다. 그리고 1992년 10월 31일, 교황청 과학원에서 연설을 통해 갈릴레오의 교적을 회복함을 선언하면서 이 사건이 교회와 과학계 간의 이해 부족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일이라고 사과하였다. 359년 만에 갈릴레오의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미 신화가 되어버린 과학자의 이야기는 마무리되지 않았다. 그가 불완전하게나마 만들었던 과학의 길은 뉴턴, 아인슈타인 등 또 다른 거인들을 거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갈릴레오의 신화에 과장이 섞여 있더라도 그가 시대를 앞서간 위대한 과학자임은 변함없는 사실일 것이다.

1640년에 그려진 갈릴레이의 초상화.

참고자료

  1. 마이클 화이트(김명남 역). 2009. 갈릴레오. 사이언스북스
  2. 윌리엄 쉬어, 마리아노 아르티가스(고중숙 역). 2006. 갈릴레오의 진실. 동아시아
  3. 다나카 이치로(서수지 역). 2018. 400년 전. 그 법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사람과 나무사이
  4. 데이바 소벨(홍현숙 역). 2012. 갈릴레오의 딸. 웅진지식하우스
  5. 양젠예 (강초아 역). 2021. 과학자의 흑역사. 현대지성
  6. 1992. 갈릴레오 갈릴레이 파문 3백59년만에 철회.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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