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과학사: 좁은 틈에서 찾아낸 거대한 우주의 비밀

 1841년 2월 12일. 런던에서 열린 왕립 천문학회 연례 회의에서 당시 천문학회장이었으며 영국의 전설적 천문학자인 존 허셜이 연단에 섰다.

“고정된 별의 시차 문제는 아주 오래전부터 천문학자들의 관심을 받아 온 주제입니다. 이는 항성 천문학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 중략 – 천문학에서 가장 섬세하고 어려운 연구 중 하나인 이 과제에서 그는 최고의 찬사를 받을 만한 끈기와 통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진행한 것은 매년 수여하는 왕립 학회 금메달을 수여하면서 진행한 축하 연설이었다. 정작 거리가 멀어 수여식에 참석하지 않은 이 인물은 독일의 한 천문학자였다. 허셜의 말처럼 오랜 천문학자들의 숙원을 풀어낸 그의 이름은 프리드리히 베셀이었다.

 베셀의 대단한 업적을 이야기하려면 천문학자들이 도대체 어떤 숙원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오랜 과거, 인류가 저 하늘을 주의 깊게 쳐다본 이후부터 과연 하늘에 있는 태양, 달, 별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과거 인간들에게 하늘의 뜻을 알기 위해 변화하는 천체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그들만의 우주관이 생성되었고 여러 이야기 중 최종 승리한 것은 지구 중심으로 하늘이 움직이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이었다. 고대인들에게 눈으로 보이는 천체의 움직임으로 지구의 움직임을 떠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속칭 ‘천동설’은 아주 오랜 기간 하늘을 해석하는 해설서가 되어주었다.

천동설과 지동설. 지구가 중심에 있느냐 태양이 중심에 있느냐는 아주 큰 차이였다.


 중세의 종교관과 결합한 천동설은 더욱더 견고한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천동설 역시 완벽하게 하늘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없었다. 단지 그보다 나아 보이는 이론이 없었을뿐더러 이 정도 오차는 열악한 당시의 관측 기술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혁명의 씨앗이 심어졌다. 폴란드의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고대 그리스 시절 잠시 나왔다가 잊혀진 ‘태양 중심’의 움직임을 가진 지동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초기에는 그리 거세지 않았던 지동설의 바람은 점점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면서 그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라는 거장들을 거치면서 수천 년의 거목인 천동설이 쓰러지고 지동설이 새로운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인식은 변화했다. 하지만 지동설에는 아직도 큰 문제가 하나 남아있었다. 정말로 지구가 움직인다면 꼭 보여야 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눈이 2개 존재한다. 이 두 개의 눈으로 인간은 거리감, 깊이감 같은 정보를 높은 정확도로 얻을 수 있다. 자 우리 눈 사이의 거리는 대략 6cm 정도라 할 수 있다. 손가락을 들고 양 눈을 번갈아 뜨면서 보면 손가락의 위치가 달라져 보인다. 서로 다른 위치에 존재하는 각각의 눈이 보는 사물의 방향이 방금 이야기한 손가락처럼 약간은 달라지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여 거리를 알아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시차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시차는 지구에 있는 사람이라면 별을 보면서 모두 확인할 수 있어야 했다. 만약 태양을 중심으로 두고 지구가 공전을 한다면 6개월 간격으로 지구 공전 궤도 지름만큼의 거리 차이가 생긴다. 이 차이는 사람 눈 사이의 6cm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큰 거리이다. 그렇다면 저 하늘의 별을 봤을 때 그 위치가 한쪽 눈을 뜨고 본 손가락처럼 달라져야 한다. 1년의 주기를 두고 나타나는 이 연주시차는 지구 공전의 아주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었다. 다만 그 어떤 천문학자도 별의 움직임을 확인할 수 없었다. 연주시차는 지동설의 아킬레스건처럼 보였다.

연주시차를 나타내는 그림. 지구가 태양을 중심에 두고 공전하면서 별이 보이는 위치가 달라진다. (사진: 한국천문연구원)


 당연하게도 이런 문제점을 그냥 두고 볼 학자들이 아니었다. 맨눈으로 전혀 구별할 수 없던 시차였지만 망원경이라는 강력한 도구도 생겼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난관에 도전했다. 영국의 유명한 학자였던 로버트 훅은 특이한 방식으로 연주시차를 관측하려 했다. 아무리 망원경이 있어도 정밀도에 문제가 있었다. 각기 다른 재료로 만든 망원경이 수축이나 변형의 영향도 있을 수 있었다. 훅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특정 별 하나를 선정했다. 런던의 천정 근처 지역을 지나는 별, 엘타닌이었다. 그는 집 지붕에 구멍을 내고 그 자리에 수직으로 된 망원경을 설치했다. 천정을 지나는 엘타닌만을 보기 위한 고정된 망원경이었던 것이다. 몇 번의 관측 끝에 훅은 엘타닌의 위치에 약간의 변화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신뢰성에 문제가 있었다. 천정 부분을 향해 고정시킨 망원경이었음에도 안정적으로 작동시키기가 어려웠다. (심지어 바람 때문에 집이 흔들리는 것도 문제였다.) 훅은 이 관측에 질려버렸고 시차를 발견했다고 발표하기는 했지만 다른 과학자들의 동의를 얻지는 못했다.

용자리의 모습. 동그라미 쳐진 별이 엘타닌이다. (사진: 의왕어린이천문대 훈남쌤)


 훅에 이어 또다시 엘타닌에 도전한 인물이 있었다. 훗날 왕실천문관이 되는 제임스 브래들리였다. 그 역시 천정을 바라보는 망원경을 이용했다. 훅의 시대보다 50년 가까이 지나면서 좀 더 정밀한 측정이 가능해졌다. 추가로 브래들리는 엘타닌 한 개의 별이 아닌 주변의 다른 별도 같이 관측하면서 더 많은 데이터를 쌓았다. 과연 ‘예상대로’ 엘타닌에는 움직임이 있었다. 문제는 그 움직이는 방향은 ‘예상대로’가 아니었다. 뭔가 이상했다.

로버트 훅의 천정 망원경 그림.


 브래들리가 관측한 움직임은 연주시차로 예상되는 움직임과 90도 정도 차이가 있었다. 또한 엘타닌 이외에 다른 별에서도 같은 형태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만약 연주시차가 맞다면 거리가 가까이 있는 별은 움직임이 크고 멀리 있는 별은 움직임이 작아야 한다. 그런데 모든 관측한 별이 같은 움직임을 보인다? 모든 별이 같은 거리에 있다는 이상한 상황이 된다. 이는 연주시차가 아니었다. 브래들리가 발견한 것은 지구 공전으로 인해 빛이 다른 각도로 들어오는 ‘광행차’였다. 결국 브래들리는 연주시차를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광행차 역시 지구가 공전한다는 첫 번째 물리적 증거가 될 수 있었다. 결국 지구는 움직인다. 연주시차만 못 봤을 뿐이다.

제임스 브래들리의 초상화
광행차를 나타낸 그림. 지구가 움직이면서 별의 위치가 다르게 보이는 현상이다.


 지구의 움직임을 증명하기 위함이라면 연주시차를 측정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어졌다. 이미 지구가 움직인다고 사람들은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브래들리에 의해 물리적 증거도 밝혀졌다. 그럼에도 연주시차는 꼭 찾아야 하는 중요한 미션이었다. 이를 이용하여 별까지의 거리를 알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아낸 각도를 이용해 삼각법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연주시차만 알 수 있다면 인류는 태양계 바깥 천체까지의 거리를 처음으로 정확히 알아낼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당시 학자들은 연주시차에 대한 연구를 끊임없이 이어갔다. 문제는 그 신뢰성을 알기 어려운 데이터가 쏟아졌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측정 장비 수준으로는 아주 미세한 별의 움직임을 특정하기 어려웠다. 렌즈의 문제, 망원경을 지탱하는 마운트의 문제, 관측 당시 하늘의 상태, 온도, 심지어 관측자의 편향된 시각이나 습관까지 정말 다양한 문제가 연주시차 측정을 방해하고 있었다. 브래들리가 연주시차를 측정하려다 광행차를 발견한 뒤 약 100여 년이 지나고 나서야 무언가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베셀의 모습


 그 실마리를 풀어준 사람은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던 해운 회사의 직원이었던 프리드리히 베셀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학교를 중퇴하고 일찍 취업의 길에 뛰어들었다. 해운 회사에 회계 작업을 담당하던 그는 수학적인 부분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또한 자신의 커리어에 필요한 공부를 혼자서 계속 진행했는데 당시 회계 작업 이외에 항해에 필요한 계산은 당연히 위치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베셀이 먼저 알아야 했던 지식은 천문학이었다. 그 독학의 과정에서 자신이 계산한 혜성의 궤도가 정말 제대로 된 것이 맞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그는 지역의 천문학자였던 올베르스를 찾아갔다. 막 20살이 된 청년 베셀이 천문학의 길로 들어가게 된 순간이었다.

 올베르스의 지도 아래 베셀의 첫 논문이 나왔다. 해당 논문은 베셀의 인생을 크게 바꿔버렸다. 다니던 해운 회사에서 받을 수 있던 금액의 7분의 1에 해당하는 적은 임금을 받고 천문대에서의 일에 뛰어들었다. 본인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면서 천문학계에서 승승장구하던 베셀의 주요 관심사는 ‘하늘의 좌표’였다. 그가 처음 천문학으로 집중적으로 공부하게 만든 항해와 관련해서 중요한 점은 별의 정확한 위치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관측기기의 광학적 결함으로 이 부분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베셀은 이 한계를 뛰어넘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프로이센의 빌헬름 3세가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새로운 국립 천문대를 만들 예정이었는데 베셀이 그 천문대의 대장으로 추천된 것이었다. 1813년에 완공된 천문대에서 베셀은 기존에 만들어진 별의 위치 데이터를 보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작업했던 자료는 그리니치에서 브래들리가 수행했던 관측자료였다. 3000개가 넘는 별의 위치를 수정하면서 관측기기와 인간의 완벽하지 못한 관측을 조정하는 것에 익숙해진 그에게 신뢰성이 떨어지는 ‘연주시차’ 연구자료는 오히려 흥미로운 주제였다. 여러 뛰어난 선배 천문학자들이, 그리고 동료 학자들이 도전했지만 도저히 종잡을 수 없던 연주시차. 그의 정확한 관측이라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베셀이 평생을 보낸 쾨니히스베르크 천문대의 사진. 천문대는 2차 대전 당시 폭격에 의해 파괴되었다.


 베셀은 연주시차를 위해 특별한 별을 찾으려 했다. 별이 너무 멀리 있어서 연주시차 관측이 어려운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가까운 별을 관측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별이 가까이 있는 별일까. 별에는 고유운동이라는 것이 있다. 지구가 움직이는 것과 관계없이 별 자체도 어디론가 계속 이동하고 있다. 이 별의 움직임이 천구 상에 보이는 것이 고유운동이라 한다. 만약 지구에 가까이 있는 별이라면 이 고유운동이 크게 보일 것이다. 마침 이전에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주세페 피아치가 7600개에 가까운 별 목록을 만들면서 특이한 별을 찾았다. 다른 별들보다 압도적으로 고유운동이 큰 별이었다. 그 별은 백조자리에 있는 61 Cygni였다.

백조자리의 사진. 동그랗게 표시한 곳에 있는 별이 61 Cygni이다. 이 별은 실제로는 쌍성이다. (사진: 의왕어린이천문대 훈남쌤)


 관측해야 하는 주제가 있고 관측해야 하는 대상도 찾아냈다. 이제 베셀에게 필요한 것은 그 누구보다 정교하고 치밀하게 만들어진 관측 장비였다. 그리고 그 관측 장비에 대한 갈증을 풀어줄 사람 역시 그 시기에 존재했다. 당시 독일을 유리 관련 산업의 최전선으로 만들었던 불세출의 망원경 제작자 요제프 폰 프라운호퍼가 그 열쇠였다. 뉴턴 이후 등장한 광학 이론을 여러 실험으로 발전시키면서 유럽 전역에 최고급 망원경을 제작하던 프라운호퍼에게 베셀 역시 자신의 망원경을 부탁했다. 베셀이 프라운호퍼에게 망원경 제작을 의뢰했을 때 그는 병에 걸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 1826년 프라운호퍼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제자들에 의해 마무리된 베셀의 망원경은 1829년 쾨니히스베르크 천문대에 인계되었다. 그런데 베셀이 받은 망원경은 조금 특이한 망원경이었다. 렌즈가 정확하게 절반으로 잘려 있는 이 망원경은 사실 태양 관측용 망원경이었다.

베셀의 헬리오미터.
헬리오미터의 구조. 렌즈가 분할되어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베셀은 일반적인 망원경으로는 시차 측정이 어려울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태양의 지름을 측정할 때 사용하는 헬리오미터라는 장비였다. 프라운호퍼의 정확한 기술로 절단된 렌즈는 나사를 돌려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했다. 베셀은 이 장비를 이용하여 두 별 사이의 각거리를 측정하려 했다. 렌즈를 조금씩 움직여 두 별의 상이 겹치는 부분을 측정하는 방식이었다. 렌즈를 움직인 정도를 확인할 수 있는 눈금 역시 제공되었는데 워낙 간격이 좁아 현미경으로 확인해야 할 정도였다. 이 망원경에는 다른 망원경보다 좋은 이점이 또 있었다. 시야가 넓어 비교할 배경 별을 관측하기 수월했다. 또한 두 별의 상대적 거리를 측정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대기의 흔들림에도 별문제가 없었다. 어차피 비교별과 대상별이 같이 흔들리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장비에 익숙해지는 과정이 필요했다. 정확한 장비로 정확한 측정을 하기 위해서 본인이 숙련되어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기간은 무려 5년을 넘기고 있었다.

 긴 적응기 이후에도 핼리혜성이라는 천문학계를 강타한 관측 대상도 찾아오고 나라에서 의뢰한 위도 측정의 업무 등으로 연주시차 측정에 좀처럼 뛰어들 수 없었다. 그러던 1837년, 베셀의 동료 천문학자였던 빌헬름 스트루베가 (역시나 또 다른 프라운호퍼의 망원경으로) 연주시차를 측정했다는 연구자료가 전해졌다. 그는 여름철 가장 밝은 별인 직녀별을 대상으로 삼았다. 1835년부터 1836년까지 1년 동안 17번 관측한 자료에 따르면 베가에서 연주시차로 보이는 변화가 그려져 있었다. 다만 이 연구에는 문제가 좀 있었다. 표본이 17개로 너무 적었던 것이다. 아직 정확도에 문제가 있어 보이는 연구를 본 베셀은 드디어 자신이 뛰어들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그리고 바로 1837년 10월부터 1년간 관측을 진행했다. 하룻밤에만 10번 이상씩 측정하면서 평균을 내고 정확도를 높이는 작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결과 61 Cygni의 위치에는 분명히 변화가 있었다.

 베셀의 측정값은 약 0.314초 각이었다. 그 차이는 보름달 지름의 약 6000분의 1 수준이었다. 이 각도를 통해 알아낸 별까지의 거리는 약 10,4광년이었다. 이 수치는 현대의 인공위성으로 측정한 값과 고작 1광년 남짓한 차이로 10% 이내의 오차를 보였다. 당시의 기술력과 현대의 기술력 차이를 생각하면 엄청난 정확도였다. 1838년, 베셀의 발표 이후 남반구에서 같은 작업을 진행했던 토마스 핸더슨의 발표도 이어졌다. 그는 1833년, 남반구의 알파 센타우리를 관측하였고 그 분석 작업을 뒤늦게 마쳐 알렸던 것이다. 스트루베 역시 1839년에 베가 시차 관측을 추가로 진행하여 발표했다. 이전 관측에 비해 무려 두 배나 큰 값이 나와 정확도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고 말았다. 훗날 스트루베는 본인의 논문에서 자신보다 늦은 발표였지만 훨씬 정교한 값을 보여준 베셀이 연주시차의 최초 발견자임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빌헬름 스트루베와 토마스 핸더슨. 스트루베의 1839년 측정값은 현대 측정값의 약 2배 정도로 큰 차이를 보였으며 핸더슨의 경우에는 55% 정도의 차이를 보였다. 스트루베의 경우에는 망원경의 시야가 좁아 베가와 비교할 배경별을 선정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핸더슨은 별 선정은 성공적이었으나 당시 남반구에 있는 망원경 성능에 한계가 있었다.


 베셀은 이 발견으로 영국 왕립 천문학회의 1841년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는 두 번째 수상이었으며 그가 당시 천문학계에서 엄청난 위상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베셀은 비슷한 시기 시차를 측정했던 스트루베나 핸더슨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스트루베는 이후 러시아 풀코보 천문대의 소장이 되었으며 핸더슨은 스코틀랜드 왕립 천문학자이자 애든버러 대학 교수가 되었다. 베셀은 그들과 달리 여러 제안을 거절하고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남은 여생을 보냈다.

 베셀의 연주시차 발견은 단순하게 별까지의 거리를 측정했다는 말로 끝내기에는 너무나 큰 업적이었다. 그는 천문학에서 측정을 어떤 방식으로 진행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측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보여주는 예시가 되었다. 단순히 별을 바라보는 것이었던 천문학이 물리적인 측정이 가능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어쩌면 근대적인 천체물리학은 베셀의 측정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은 아닐까.

참고자료

  1. 앨런 허시펠드. 2001. Parallax: The Race to Measure the Cosmos
  2. 지웅배. 2025. 갈 수 없지만 알 수 있는. 더숲
  3. 이광식. 2018. 천문학 콘서트. 더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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